100년 전 소비주의의 탄생을 돌아보며

 

서구 사회든, 서구화를 겪은 사회든, 오늘날 발견되는 소비주의 문화에는 역사적 기원이 있다. 오늘날 우리가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소비주의 문화는 어느 특정 시기, 특정 나라에서 태동하여 오늘날 그 문화가 보이는 사회들로 전파된 것이다. 그 시기와 나라는 무엇인가? 1920년대, 미국이다.

 

1920년대 미국 사회의 한 가지 특징은 전기, 자동차 등 19세기 발명품이 대중적 힘을 행사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20세기 초 1%도 안되는 미국 가정에서 사용되던 전기는 1920년대에 이르면 거의 70%의 보급률을 보인다. 가히 전기 혁명이라 이를 만하다. 바로 이 힘으로 최초의 대중 전기 미디어인 라디오가 다량 생산, 유통되었다. 더불어 전국 각지에 배포되는 잡지가 이 시대에 탄생되었다. 자동화의 초기 형태와 대량 생산 기술이 보급, 시행된 시기도 바로 이 시기이다.

 

이와 더불어 대중 마케팅이라는 것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것도 1920년대라는 사실도 기억해두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살펴봐야 하는 인물이 있는데, 프로이트의 조카이기도 한 에드워드 버네이스Edward Bernays라는 사람이다. 그는 미국 대중 정보 위원회Committee on Public Information에서 일하는데,‘Public Relation’이라는 단어를 고안하고, 마케팅 연구 분야를 혁신한 인물이기도 하다. 1928년 버네이스는 이렇게 적고 있다.

 

대중의 습관과 의견에 대한 의식적이고 지적인 조작은 민주 사회의 한 가지 중대한 요소다. 사회의 이러한 보이지 않는 메커니즘을 조작하는 이들이야말로 이 나라의 실질적인 지배 권력인, 보이지 않는 정부의 주인들이다. 우리는 지배되고, 우리의 정신은 주조되며, 우리의 취향은 형성되고, 우리의 생각은 제안된다. 대개는 우리가 들어본 적도 없는 이들에 의해서 말이다.”

 

소비사회를 한껏 만끽하며 전례 없는 행복을 누리는 것처럼 보이는 우리가 실은 어떤 상황 속에 있는지, 버네이스는 예리하게 일깨워준다. 1920년대라 하면, 거의 100년 전이지만, 소비사회 내 소비자의 처지는 그때나 지금이나 하등 다를 바가 없다. 제품의 소비에 관한 한, 우리는 절대 행위 또는 선택의 주체가 아니다. 쇼핑몰에서의 내 행동의 절대 기준은 내 기호, 취향이지만, 내가 내 기호, 취향이라고 느끼는 것의 출처는 실은 내가 아니라, 쇼핑몰에 제품을 전시하는 이들의 마케팅이자 그 마케팅의 파장력과 무관하지 않은 각종 미디어들이다.

 

내가 이 메커니즘의 외부에 서고자 한다면, 나는 당장 대중 사회의 일자들에게 발각될 것이다. 그런 나는, 벤츠와 볼보, 폭스바겐, 토요타가 질주하는 거리에 갑자기 나타난 경운기나 마차처럼 보일 것이다.

 

1920년대 미국으로 돌아가, 버네이스의 사업 파트너, 폴 마주르Paul Mazur의 말을 들어보기로 하자.

 

우리는 미국을 필요의 문화에서 욕망의 문화로 바꾸어야만 한다사람들은 욕망하도록, 새로운 것을 원하도록, 심지어 옛 것이 완전히 다 소비되기 이전에 그런 마음을 품도록 길들여져야 한다. 우리는 새로운 맨털리티를 주조해야 한다. 인간의 욕망이 인간의 필요를 압도해야만 한다.”

 

마주르의 발언은 자본주의 소비사회의 본질을 명쾌히 지적해준다. 버네이스처럼, 마주르 역시 자본주의 소비사회의 비판가가 아니라 기획자에 속하는데 이들의 언명을 살펴본다는 건, 우리가 어떻게 이 광기의 소용돌이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원점을 살펴본다는 것과도 같다.

 

오늘의 삶을 돌아보건대, 과연 우리는 저 대중소비주의 기획자들의 의도대로 살게 되었다. 현재의 제품이 아직 쓸모 있음에도 신제품이 나오면 신제품으로 교체해버리고, 내가 무엇이 필요한가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욕망하는지가, 아니 그보다는 내 친구와 이웃이 무엇을 욕망하는지가 내 행동을 좌우하는 주요 인자가 되어버렸다. 오늘의 신제품이 48시간 전의 신제품을 잡아먹는 신제품의 회로 속을, 오늘의 새로운 욕망과 표현이 48시간의 낡은 욕망과 표현을 대체하는 욕망의 회로 속을, 우리는 기꺼이 질주한다.

 

하지만 이렇게 살 때 우리는 주체로서 사는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이렇게 살 때, 있는 건 행위뿐이다. 그 행위 속에는 행위의 참다운 주체가 없고, 행위 그 자체가 행위 주체에게 주는 기쁨과 보람이 없다. 나라는 독특한 개성의 인물은 그 행위 속에 없고, 오로지 다른 아무개로 대체해도 아무런 차이가 없는 아무개 고객님이 있을 뿐이다.

 

당신이 주장하려는 바가 무언지, 대강 알겠는데, 하지만 딱히 뾰족한 수가 있겠는가? 대중소비자본주의의 메커니즘이 이대로 작동하는 한, 이 메커니즘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개인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메커니즘의 실상을, 그 효과를 제대로 인식하며 삶의 주체성을 최대한 살리는 길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 길은, 대중소비주의의 기획자 폴 마주르의 머리 꼭대기에 올라가 그가 의도한 바와는 최대한 다른 방향으로 삶을 기획하는 길이다. 이 길은 물론, 이제와는 다른, 새로운 태도와 행동 선택으로 가능하다. 달리 말해 우리는 새로운 삶을 우리 스스로 기획해야 한다. 그것은, 신제품으로 금방 갈아타는 것이 좋은 삶이라는 보편적 사고를 의심하는 일, 내가 버린 구제품이 어디로 가서 어떻게 사용되는지, 폐기되는지 관심을 두는 일, 필요와 욕망의 차이를 생각하는 일로 가능한, 새로운 삶이다. (2015, 우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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