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 없는 사회

 

2013년이 지나고 2014년이 되었다. 한 해 안녕들하시라고, 덕담을 주고 받지만 새해가 “밝은” 한 해, “안녕한”한 해가 될지 어쩔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기적이 일어나면 김기춘 일당과 백설공주를 권좌에서 쫓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런다고 희망이 보일까? 안철수가 박정희 참배를 했다는데, 놀랄 일도 아니다. 설사 모든 밑그림이 반-박파의 염원대로 되어, 문재인 같은 이가 새 정부의 주인이 된다 해도, 지난 대선 때의 공약을 생각해볼 때, 얼마나 밝은 희망을 줄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한마디로 지금 한국의 문제는 유신 망령의 부활이나 공공 서비스 부문의 사영화이기 이전에, 언론의 기능상실, 민주주의의 퇴보 이전에,‘비전 부재’일 것이다. 모든 사회 부문에 합의된 비전이 없다.

우선, 교육에 비전이 없다. 교육에 비전이 없다는 건 곧 어떤 미래 세대를 만들어내고, 어떤 미래를 만들어낼 것이냐에 사회적으로 합의된 비전이 없다는 말과도 같다. 전후 개발독재 기간의 역사 과정의 공과, 신자유주의 경제, 재벌 중심의 경제체제, 금융자본주의, 도시집중화, 도시주거환경과 도시건축, 농업 등 중대한 사회 이슈에 대해 토론할 기회를 미래 세대가 가지지 못하니, 바람직한 삶의 비전과 현실화의 모색은 오리무중이다. 한국의 교육은 비전을 갖춘 인재양성 시스템이 아니라, 경쟁사회 시스템에 이끌려가는 예비 경쟁 시스템이다.

영어교육에 대한 전사회적인 비전이 없다. 영어교육 문제는 단순히 영어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어라는 모어가 학계와 시민사회에서, 또 문화의 차원에서 차지하는 위상에 관한 문제다. 이 문제에 관해 지금 누가 비전을 가지고 있고, 비전을 찾아보자고 사회적 토론을 이끌어내고 있는가? 그저 시장의 흐름에, 영어를 바로미터로 하는 경쟁질서의 흐름에, 되는 대로 맡겨둘 뿐이다. 전사회적인 방기이다.

핵발전 문제에 관해 비전이 없다. 덴마크나 독일 같은 나라는 벌써 수년 전에 2050 에너지 비전을 국가 차원에서 만들어서 추진하고 있다. 이 비전에 따르면 이들은 2050년까지 탈핵, 탈화석연료를 진행, 전체 에너지의 50%~100%를 신재생에너지로 공급하겠다는 입장이다. 이에 반해, 한국은 2030조차도 없다. 2030년 신재생에너지 보급목표율을 11%로 잡아놓고 있을 정도니 말 다했다. 더욱 가관인 건, 지금 전세계가 탈핵의 방향으로 가는데, 나홀로 역주행하겠다는 외고집이다. 2013년 12월, 산업통상자원부는 국회에 기존의 계획된 핵발전소 이외에 추가로 7기의 발전소 건설이 필요하다고 보고한 바 있다. 문제는 이런 역주행에 대한 시민사회의 반발도 미미하다는 것이다. 무개념, 무감각의 주체는 정부만이 아니다.

기후변화에 대한 사회공동체나 정부의 입장은 비전 부재 정도를 넘어선다. 기후변화 따위는 음모론이기를 바라는, 막연히 음모론일 것이라는 우매한 정신 태도가 전사회에 만연하다. 마치 당장 거기서 대포알이 날라 올 판인데, 서해에 도착한 서양의 함선에 이방의 천사들이 있기를 바랐던, 19세기 후반 백의민족의 우매함과도 같다.

서울근교만이 아니라 전국이 초미세먼지에 뒤덮여 많은 이들이 고통과 불편을 겪고 있음에도, 이런 국제적 환경오염 사태에 대한 대처에서도 사회공동체 차원의 비전이 없다! 중국과 한국의 화석연료 연소가 주범임이 자명함에도, 자연의 일이니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생각하고 마니, 어찌 21세기 시민 (교양인)이라 할 수 있을까? 환경권은 건강권, 인권의 핵심이다. 국익 좋아하는 인간들이 정말로 국익을 원한다면, 그걸 가능하게 할 인적 자원의 환경권을 보호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누가 중국을 대상으로 한 국제환경소송을 준비하고 있는가?

그 무엇보다도 가장 큰 문제는, 이러이러한 삶이‘바람직한’삶이고 미래이고 나라라는, 사회공동체 구성원이 대체로 합의한 사회상의 그림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곧, 좋은 삶이 무엇인지에 대한 감각인 에토스ethos의 사회적 빈곤을 뜻한다. 이 에토스가 한국 사회에 아주 없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를테면 포실하게 먹고, 미끈하게 놀고, 무병한 것! 그러나 이는‘잘먹고 잘사는 사회’가 사회공동체의 비전이었던 저 1960년대, 70년대를 살던 이들마저도 가지고 있던 삶의 에토스가 아닌가. 광복 70년을 앞두고 있고, 전례없는 미지의 미래로 세계가 진입하고 있는 마당에, 다른 미래의 준비가 꼭 필요하다. (2014, 우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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