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설픈 환경주의라는 악마

 

“그곳에 사람들이 모아 돌탑을 쌓았다. 돌탑 아래에는 더러운 쓰레기들이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그리고 돌탑을 쌓느라고 산마루에 있던 크고 작은 돌들을 죄다 옮겨놓았기 때문에 흙이 빗물에 자꾸만 씻겨 내려가고 있었다. 나는 쌓아올린 돌들을 다시 들어 흙 위에 내려놓고 싶었다. 내게는 돌탑을 해체하고, 쓰레기를 주워오는 것만이 희망으로 보였다.”

 

-안치운, <그리움으로 걷는 옛길> 중에서

 

자연환경 파괴 이야기가 나오면, 혹자는 인간이 문제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는 사태의 해결에 별반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자연환경 파괴의 주범은 막연한 범주의 인간이 아니라, 자연의 살점을 베지 않고는 생산 자체를 할 수 없는, 그리하여 이윤 창출을 할 수 없는 기업들이고, 이 기업들의 생산물, 즉 제품을 소비하는 소비자들이다.

그러나 한국사회의 경우, 사태를 유지하며 악화시키는 공범이 있다. 그건 우리의 환경의식과 환경활동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인‘어설픈 환경주의’이다.

어설픈 환경주의의 가장 대표적인 버전은‘친환경 기업’일 것이다. 기업의 사익 추구와 환경 보존, 충돌하게 되어 있는 이 두 가치가 (환경을 생각하는 기업 따위로) 행복하게 공존할 수 있다는 기업 논리. 자연환경 파괴 문제의 해법을 비즈니스 모델에서 찾으려는 모든 시도도 같은 류다. 지오엔지니어링 따위도 여기에 포함된다. 국가 자체가 이 길을 국가 정책으로 추구한 경우도 있으니, 바로 이명박 정부의‘녹색 성장’정책이다.

물론 기업의 사회적 책임, 즉 CSR(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 자체롤, CSR을 구현하려는 건전한 기업들의 노력까지를 모두 싸잡아 어설픈 환경주의로 매도하려는 건 아니다. 어설픈 환경주의는, 무늬만 CSR를 표방해놓고, 실제로는 환경영향 책임을 최대한 회피하려는 정신성을 일컫는다.

어설픈 환경주의는 사태의 본말을 전도하고, 문제의 진원지를 은폐한다. 죄를 지은 범법자가 형벌을 부과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검사가 될 수 있나? 그와 유사한 이상한 일이, 1992년 리우 정상회담에서 아젠다 21이 채택된 이래로 일어나고 있고, 있어 왔다.

환경을 파괴하는 기업도 나쁘지만,‘환경을 생각하는 기업’따위의 허황된, 혹세무민하는 위선의 문구가 실은 더 나쁘다. 그리고 그런 광고를 기획하고 제작하는 데 참여한 이들 모두가 다, 자연과 생명의 엄정한 법정에선, 일종의 범죄자들이라고 봐야 한다.

어설픈 환경주의는 그러나 기업 논리의 형태로만 실현되지 않는다. 어쩌면 이 악마적 이데올로기는 우리들 거의 모든 이들의 마음에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 가운데 자연을 싫어하는 이가 있을까? 자연이 파괴되는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보며 희희낙낙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우리 가운데 있을 수 있을까? 우리가 자연이며, 늘 자연에 의존하고 있으니 자연을 적대시한다는 건 오직 무지할 때만이 가능한 일이다. 모두가 자연 애호가들이고, 친환경론자들이다. 하다못해 이명박도 자신이 친환경주의자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모두가 친환경주의자이고 자연 애호가이다. 그러나 행동하는 이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어떻게 이게 가능한가? 간단하다. 자연이 파괴되는 생산의 현장에서 눈을 돌리면 된다. 적극적으로 알기를 포기하면, 즉 적극적 무지를 선택하면, 나는 얼마든지 친환경주의자로서도, 갖은 쾌락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다.

이러한 선택은, 한국의 경우, 개인들의 선택이라기보다는 사회집단 전체의 선택으로 보인다. 한국은 더 많이 성장하고, 발전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반개발론, 엄격한 환경주의의 잣대는 잠시 제쳐두어야 한다는 것. 이러한 에토스가 어설픈 환경주의를 배태한 문제의 진앙지다.

지난 이명박 정권 당시 진행되었던 4대강 사업. 이 사업이 진행될 때 환경운동가들, 일부 시인들, 예술가들, 종교인들은 분노하고 통곡했다(고 들었다.) 그러나 대대적인 촛불시위나 대대적인 민중 항거가, 시민 불복종 운동이 지방 곳곳에서, 강의 공사 현장마다 일어났다는 뉴스는 듣지 못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한가지 중요한 이유는 어설픈 환경주의라는 정신성의 지배가 강고하기 때문 일 것이다.

산업화시대, 고도압축성장 시대를 통과하면서 한국인의 대다수는 슬프게도 어설픈 환경주의자들이 되고 말았다. 어설픈 환경주의. 이 말에 붙은 형용사 ‘어설픈’을 우리의 정신과 삶의 현장에서 분리시켜야만 한다. (2014, 우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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