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식 이야기 (2)

중국의 어느 노승 이야기

 

우리가 먹는 것이 곧 우리 자신이다.

 

이런 말을 들어봤나요? 이 말도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지만, 딱 맞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가 누구인지를 말하려면, 차라리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우리가 관계 맺는 것이 곧 우리 자신이다.

 

쉼 쉰다는 것, 살아간다는 것은 사실상 관계 맺는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하지만 관계 맺는다는 건 무언가요? 관계 맺는다는 건 무언가를 주고, 무언가를 받는다는 걸 뜻합니다. 달리 말해서, 무언가가 우리 신체에서 나가고, 무언가가 우리 신체로 들어온다면, 우리는 관계를 맺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죠.

 

몸 안팎으로 무언가를 들이고 내는 활동을 다른 말로도 표현할 수 있어요. 제가 선호하는 한 가지는 ‘환경영향활동’이라는 표현입니다. 우리는 오직 환경영향을 신체 밖으로부터 받으면서, 신체 밖에 미치면서만 살아가지요. 그래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무엇이냐 했을 때, 적어도 물리학적이고 생태학적인 관점에서는 ‘환경영향활동’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우리 인간은 지적, 문화적, 도덕적, 물리적 환경영향활동입니다. 다른 생물종에 비해서 환경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도 다차원적이고 또 그 규모도 어마어마하니, 아주 터무니없는 표현은 아닙니다. 만일 뇌세포, 신경세포, DNA, 영혼 같은 것이 우리 존재의 핵심이라면, 그것은 오직 환경영향활동을 통해서만 자신을 드러냅니다.

 

그런데 이러한 우리의 존재 조건이, 우리 존재의 실상이 가장 잘 확인되는 삶의 현장이 있습니다. 바로 식탁입니다. 잠시 어느 노승 이야기를 해볼게요. 빌 포터라는 사람은 산에 홀로 은둔하며 살던 중국의 어느 노승을 찾아갑니다. 그의 삶을 엿보고 무언가 가르침을 얻기 위해서였을 겁니다. 그런데 그 노승은 파란 눈을 한 이 낯선 인터뷰어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약간의 밀가루, 기름(오일), 소금만을 먹고 살고 있다고요. 놀랍게도 이 노승은 약 50년을 같은 산에서 홀로 살았다고 합니다.* 50년 내내 이것만을 먹고 살았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몸에 필요한 몇 가지만을 먹고 살아간 것만은 확실합니다.

 

이 노승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생각거리를 던져줍니다. 인간은 먹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일개 생명체라는 것. 그러나 무엇을 어떻게 먹을지는 얼마든지 선택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선택은 한 인간이 어떤 류의 인간인지를 꽤 많이 말해준다는 것.

 

자, 산에서 내려와 우리가 사는 도시로 돌아와 볼까요? 도시의 식탁 위엔 얼마나 많은 음식들이 있나요? 올리브 오일에 (소금을 넣어 만든) 빵을 조금 찍어 먹거나, 고추장과 참기름을 섞어 밥을 조금 먹거나. 여기에서 식사를 중단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중국의 그 노승은 여기에서 식사를 멈춥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멈추고 말기엔 오늘날 우리의 식탁엔 먹을거리가 너무 풍요롭습니다.

 

풍요롭게 먹는다는 것, 산해진미를 즐긴다는 것. 이것은 남부럽지 않게 잘 산다는 것, 건강과 웰빙을 유지한다는 것, 생존의 욕망과 심미적 욕망을 동시에 충족하며 산다는 것 이상의 무언가를 내포합니다. 아무리 감사하는 마음으로, 경건한 마음으로 먹는다 해도, 많이, 잘 먹는다는 건 곧 많이, 잘 ‘잡아먹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앞서 말한, 관계맺음, 환경영향의 논리를 식탁의 자리에 적용해보면 금방 드러나는 사실이지요. 그렇습니다. 개구리가 메뚜기를 잡아먹고, 황새가 개구리를 잡아먹고 살듯, 인간은 동식물이란 동식물은 죄 잡아먹고 살고 있고, 부엌과 식탁은 죽임과 살아감의 현장입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고요? 우리가 지금 너무 많은 동식물들을, 필요 이상으로, 죽이며 살아가고 있다는 말을 하려는 것입니다. 살려면 죽일 수밖에는 없지만, 지나치게 많이, 지나치게 잔인하게 죽이고 있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죠. 물론 지나침과 그렇지 않음의 기준이 저 중국의 노승의 기준이라고 말하려는 건 아니에요. 그러나 중국의 노승은 분명 우리에게 일러줍니다. 지금처럼 많이, 잘 먹지 않아도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요.

 

지나치게 많이 동식물을 죽이고 또 잡아먹는 동안, 우리가 나쁜 환경영향을 미치는 대상은 단순히 동식물만이 아니랍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죠. 어느 양계장 이야기입니다. 이곳은 지금 약 5,000마리의 닭을 기르고 있습니다. 비좁은 공간에 이 많은 닭을, 짧은 기간에 생산하려고 밤낮없이 불을 켜놓는데, 그만큼 전기를 많이 끌어와 쓴다는 이야기입니다. 달걀을 낳으면 기계에 돌려 수집하는데, 여기에도 전기가 쓰이고요. 사료를 끊임없이 공급해야 하는데, 사료가 이곳으로 이동하는 데도 석유가 쓰입니다.

 

이 양계장에서 자라나 우리가 사는 도시, 어느 식당에 공급되어 우리의 식탁까지 올라온 어느 닭을 우리가 먹는다 할 때, 우리의 이 행동은 오직 그 닭과만 관계 맺는 행동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그때 여러 차원의 환경영향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죠. 우리가 그 닭의 살점을 뜯어먹을 때 우리는 그 닭을 기르는 데 쓰이는 석유와 전기 역시 잡아먹고 있는 것이고, 만일 그 전기가 화석연료나 핵연료를 연소해서 생산된 것이라면, 지구생태계에 좋지 않을지도 모르는 영향을 미치면서 그 전기를 잡아먹고 있는 것이죠. CAFO(Concentrated Animal Feeding Operation)라고 명칭되는 시설에서 길러진 닭은 대개는 잔인하게 길러지고 잔인하게 죽임을 당하는데, 그런 방식으로 죽임을 당한 그 닭을 사먹는다는 건, 곧 그 잔인한 행동을 보호하고 지원하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내가 안 사 먹어도 누군가는 사 먹을 거니, 꼭 그렇게까지는 말할 수 없다는 발언은 사실 비겁한 발언입니다. 모두가 이 사실을 인정하고 그렇게 생산된 닭의 소비를, 즉 그런 식의 양계 자체를 거부한다면, 그 양계장 주인은 더는 그 잔인한 행동을 못할 테니까요.

 

요컨대, 식탁에서 무언가를 먹을 때 우리는 일정하게 환경영향을 남깁니다. 식탁에서의 선택, 음식의 선택은 곧 어떤 환경영향을 남길 것인지에 관한 선택이며, 바로 그러하기에 음식을 먹는 사람인 나 자신에 관한 선택입니다.

 

잔인함이란 무엇인가요? 이 말의 핵심은 ‘해칠 잔殘’이라는 글자에 있습니다. 인정사정 볼 것 없이 타 생명을 해하는 행위가 바로 잔입니다. 우리는 분명 지금 ‘잔殘의 시대’에 살고 있어요. 수없이 많은 이들이 이 잔의 시대를 넘어서야 한다고 말해왔지만, 여전히 잔의 시대에 머물고 있죠.

 

왜 그럴까요? 좀 더 맛 좋은, 좀 더 때깔 좋은 것을 먹고 싶다는 우리의 심미적 욕구, 좀 더 과격하게 말하면 심미적 탐욕이 문제의 전부는 아닙니다. 동식물의 권리, 생명의 권리에 관한 우리의 미개한 입장도 생각해봐야 합니다. 오직 경제 논리로만 움직이는 식품 대기업의 지배력 그리고 대중문화 역시 생각해봐야 합니다.

 

*도미니크 로로 지음, 임영신 옮김 <심플하게 산다 2-소식의 즐거움>(바다, 2014)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인디고잉 Vol 52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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