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과 야만의 기로에서, 강신준

문명과 야만의 기로에서

 

강신준 동아대 교수

 

야만의 시대가 오고 있다. 브렉시트, 트럼프의 당선, 아베의 개헌 등이 그 징표이다. 야만의 기준은 일찍이 서양 문명의 모태를 이룩한 로마인들이 세운 바 있다. 이들은 로마화가 가능한 지역과 불가능한 지역을 문명과 야만으로 구분하였고 그 기준을 법(약속)을 지킬 수 있는지의 여부로 삼았다. 브렉시트는 유럽 통합의 약속을, 아베의 개헌은 제2차 세계대전의 책임을 뒤집는 일이고, 트럼프는 선거운동 기간 내내 자신의 말과 약속을 수없이 뒤집었던 장본인이다. 사실 야만의 징후는 우리에게도 이미 다가와 있다. 747 공약을 내세웠던 이명박과 복지를 앞세웠던 박근혜 두 대통령이 모두 자신의 약속을 휴지 조각으로 만든 것을 몸소 경험하였기 때문이다. 야만은 세계 도처에서 우리의 발목을 적시면서 차오르고 있다. 야만의 시대는 무엇을 알려주는가?

일찍이 인류는 빙하기라는 극한의 생존 조건을 극복하면서 등장하였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집단적 생산력이었다. 하나의 개체로는 매우 나약한 신체조건이지만 이들 개체가 서로 손을 맞잡아 집단을 이루면서 다른 모든 동물을 뛰어넘는 생산력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생산력은 인간에게 다른 동물이 갖지 못한 여가시간을 안겨주었고 그것이 문명을 이룩하였다. 인류의 등장과 문명은 서로 손을 맞잡는 관계를 전제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로마인들이 문명의 지표로 법(약속)을 내세웠던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서로 손을 맞잡는 관계가 바로 법(약속)이기 때문이다. 야만은 이런 관계의 해체를 의미한다. 서로 맞잡았던 손이 혐오와 적대의 주먹으로 바뀌는 것이다. 당장 트럼프의 미국과 아베의 일본에서 급격히 증가하고 있는 혐오 현상이 그것을 말해준다.

그런데 문명으로 출발한 인류가 왜 이런 야만의 길을 선택하는 것일까? 문명 내부에서 이성적인 해결책이 가로막히면 절망이 지배하고 절망은 문명을 포기하고 야만을 선택하게 만든다. 지난 세기 야만의 상징이었던 히틀러가 패전으로 인한 천문학적 배상금에 1929년 공황의 직격탄을 맞으면서 모든 출구가 막힌 독일에서 등장했다는 것이 그것을 설명한다. 사실 지금 세계 도처에서 차오르는 야만도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가 빚어낸 양극화의 절망이 만들어낸 것이다. 야만을 선택한 결과는 어떠했을까? 당장 히틀러의 파시즘은 인류 최대의 전쟁과 홀로코스트의 끔찍한 참화를 안겨주었다. 문명을 거스른 대가는 참혹했던 것이다. 야만의 길을 피할 수는 없었을까?

지난 세기 야만의 시대가 다가올 때 로자 룩셈부르크는 “사회주의냐 야만이냐”고 외쳤다. 당시의 절망은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것이었고 자본주의의 이성적 대안은 사회주의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로자의 외침은 허공에서 스러졌고 파시즘이라는 비싼 대가를 치르고 나서야 인류는 비로소 동방의 사회주의와 서방의 케인스주의라는 문명의 길로 되돌아왔다. 지금의 우리에게는 어떤 이성적 해결책이 남아 있을까? 불행히도 과거의 두 대안은 지금 모두 사라지고 없다. 케인스주의는 1970년대에, 사회주의는 1990년대에 모두 유효기간이 끝나고 말았다. 하지만 우리가 맞이하고 있는 야만의 주체는 여전히 자본주의이다. 역사는 한 세기를 돌아 제자리에 와 있는 것이다. 이런 사태를 예견한 것일까? 150년 전 프랑스 혁명이 야만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마르크스는 말하였다. “역사는 반복된다. 한번은 비극으로 다른 한번은 희극으로!”

그래서 새삼 로자의 절규를 되돌아보게 된다. 물론 로자가 외쳤던 사회주의가 곧바로 지금 우리의 대안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 대안의 단서가 일부라도 담겨 있지는 않을까? 그래서 2013년 마르크스의 저작이 유네스코에서 “인류의 기록유산”으로 선정된 까닭이 범상해 보이지 않는다. 이성적 해결책이 모두 고갈된 지금 마르크스는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불편한 진실이 아닐까? 로자가 가리켰던 이성적 해결책이 바로 그것이었고 야만의 정체는 한 세기를 넘기고도 여전히 자본주의이기 때문이다. 마침 우리 사회는 대통령의 온갖 야만에 맞서 촛불을 드는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 영국, 미국, 일본에 이어 우리도 야만과 문명의 기로에 서게 된 것이다. 우리 사회가 선택할 수 있는 문명의 길은 무엇일까? 마지막 남은 불편한 진실, 마르크스에게서 지금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문명의 불씨를 다음 지면에서 얘기해보기를 약속드린다. (한겨레신문, 2016. 1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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