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사람들-안창호

2016년 11월 대한민국은 해동되었다. 황당함과 분노, 어이없음과 자괴감, 실망감과 혐오감, 이 모든 감정들이 혼합된 감정은 우리의 피를 동시에 끓게 했고, 우리의 눈을 TV 화면 앞으로, 우리의 몸을 광장으로 몰아붙였다. ‘해동’은 두 가지 양상으로 나타났다. 10대와 60대간, 호남과 영남간, 강북과 강남간 구분의 장벽이 무너지며, 시민통일전선이 구축되었다는 것. 이것이 한 가지다. 다른 하나는 잠재적 시민들이 실질적 시민들로 깨어나며 역사와 정치를 자발적으로 학습했다는 것으로, ‘국민의 시민화’라고 부를 수 있는 현상이다. 공화국 붕괴의 상황을 자각한 사람들은, 공화국의 의미를 묻고 공화국을 요구하는 시민으로 거듭났다.

전인권, 이은미 등이 광장 무대에서 <애국가>를 불렀을 때, 시민들이 촛불을 흔들며 애국가를 함께 불렀을 때, 박제된 이상으로서 국가주의의 얼음 속에 결빙되어 있던 애국가도 함께 해동되며, 대한민국이라는 글자가, 애국가의 노랫말이 우리에게 다시 처음처럼 다가왔다. 삶이 괴로워서 나라를 외면해오던 이들의 목청 속에서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애국가> 4절)라고 말하던 한 정신이 부활했다.

그 정신은 누구의 것인가? 사실 이 노래는 ‘목자 잃은 양떼’, ‘괴로웠던’ 그 모두에게 한줄기 빛이 됐던 민족의 성가였다. 그것은 가락으로 된 깃발이자 단어로 된 빛줄기였다. 청년 장준하는 1944년 7월 중국 내 일본군 군영을 탈출하여 중국군 군영에 도착, 블로하 강변에서 동지들과 애국가를 불렀다. 그리고는 이렇게 썼다. “우리는 3, 4절까지 서로의 기억을 더듬어 베껴내었다. 중국군 군영에서 오늘부터 정하여놓은 우리의 이 조례를 위하여 아침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의미로 신비스러운 것이었다.” (<돌베개>) 나라 잃은 인간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스스로에게 고지하기 위해, 조례를 만들고 또 애국가를 불렀던 것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집과 고향을 잃은 인간의 닻이었다. 누군가, 이 닻을 만든 이는?

아마도 그는 도산 안창호(1878~1938)일 것이다. 1907년 서른의 나이에 미국에서 귀국한 안창호는 미국의 ‘배기창가례(拜旗唱歌禮, 국기에 절하고 노래를 부르는 의례)’를 국내에 소개했는데, 역사학자 전우용에 따르면, 바로 이것이 오늘날 ‘국기에 대한 경례’와 ‘애국가 제창’으로 이어졌다. 안창호는 <거국가> <흥사단 입단가> 등 수많은 노랫말을 손수 지은 인물이기도 했다. 또 안용환 교수는 안창호 친필 <무궁화가 2>, 안익태의 증언 등을 근거로 애국가 작사가는 안창호라고 단언한다. 안창호를 존경하고 따랐던 춘원 이광수도 1947년에 출간한 <도산 안창호>에서 애국가의 작사가는 안창호라고 분명히 하고 있다.

고종 15년인 1878년 국운이 쇠하던 시절 태어나 스무 살 무렵 대한제국의 성립(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목도하고 서른 즈음 국가의 멸망을 보았던 사람, 서당에서 유학을 배웠지만 기독교와 서구 학문에 물들며 ‘실력 차이’를 절감했던 사람, 그러나 자신의 혈통과 사는 곳을 사랑했던 사람 (샌프란시스코, 상하이, 만주를 오가며 살았던 그였지만 그가 정말 사랑한 곳은 어린 시절 보았던 대동강변 그리고 평양이었다). 이런 운명과 기질의 안창호에게 애국이란 필생의 일, ‘종신사終身事’였던 것으로 보인다.

안창호가 난 곳은 평안남도 강서군에 있는 섬, 봉상도였다. 대동강에 있는 작은 섬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섬을 좋아해 호를 도산島山으로 지었고, ‘섬메’라는 필명으로 글을 쓰기도 했다. 그의 부친 안흥국은 가난한 농민이었는데, 막내아들 안창호가 일곱 살 때 숨을 거두고 만다. 아비를 일찍 여의고 자란 이 불운한 소년은 몇몇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하며 성장한다.

평안도 땅 어느 변방, 빈농의 아들로 자라던 한 소년을 신민회 창립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 대리 겸 내무총장, 평양 대성학교와 흥사단의 창립자, 한국독립당과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의 창립자 그리고 백범 김구가 가장 존경했던 인물로 (구익균 증언) 만들었던 ‘역사의 뗏목’이 있었으니, 십대 시절의 서울 유학과 (구세학당) 거기서 만난 기독교였다. 1894년, 청일전쟁으로 파괴된 평양성을 목격하며 충격에 휩싸인 소년은 이 사건으로 ‘나라’에 눈을 뜨며 ‘구국 운동’에 나설 것을 결심한다. 그리고 가출하여 무작정 상경하는데, 거기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건 개신교 선교사들과 구세학당이었다. 신학문을 공부하게 되는 것도, 송순명의 전도로 장로교에 입교하는 것도 구세학당과의 인연으로 가능했다.

구세학당을 졸업한 소년은, 때마침 귀국해 독립협회를 만들었던 서재필의 영향으로 독립협회에 가담하며 일평생 이어지는 ‘사회 활동’에 입문하게 된다. 스무 살이 되던 해 안창호는 독립협회 관서지부를 동지들과 만들게 되는데, 이 활동 역시 한국과 미국, 중국을 무대로 종신토록 이어진 부단한 ‘창립 활동’ (점진학교, 탄포리교회, 샌프란시스코 공립협회, 신민회, 평양 대성학교, 청년학우회, 대한인국민회, 흥사단, 대한적십자사, 동우회, 한국독립당, 대일전선통일동맹)의 첫 신호탄이었다.

이처럼 그의 생애를 되짚어보면 안창호의 삶은 탁월한 조직가이자 운동가, 지도자의 삶이었다. 이러한 삶을 떠받치던 근본 기둥은 그의 ‘본보기 사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본보기 사상이란, 사업이든 사람이든 본보기가 있다면, 일이 쉽게 성사된다는 사상이다. 흥사단興士團의 ‘흥사興士’ 또한 실력을 갖추고 일제와 투쟁하는 본보기 사람이었고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의 ‘동우同友’ 또한 수양하면서도 동시에 새로운 나라를 준비하는 집단이었다. 평양에 세운 대성학교도 본보기 학교였다. 놀랍게도 그는 “나 하나를 건전 인격으로 만드는 것이 우리 민족을 건전하게 하는 유일한 길”(이광수, <도산 안창호>)이라고도 말했는데, 사실 이는 유가적 ‘수양 사상(무실역행務實力行의 수기修己 사상)’에 바탕한 그만의 본보기 사상이었다. 바로 이것이 도산의 특색이자 위대한 점이며, 많은 이들을 감화시키고 그에게 동조하게 한 힘이었다.

한 가지 생각해봐야 하는 건, 안창호의 애국 정신은 박정희 식의 애국 정신과는 현격히 다르다는 것이다. 사실 도산의 애국 정신은 국가주의적 요소가 결락된, 저 고대 로마의 피에타스Pietas 정신이었다. 피에타스란 부모, 마을공동체, 혈족, 민족에 대한 의무감과 헌신적 태도를 뜻한다. 로마인들은 인간다운 인간, 즉 호모 후마누스Homo Humanus를 다른 동물들로부터 구별해주는 결정적 준거로 피에타스의 유무를 들었다. 안창호는 민족이 멸하던 시대였기에 당연시되었지만 실천하기는 또 어려웠던 이러한 사상에, 유가 식 수행 사상을 결합하여 ‘인간의 길’을 제시하고 또 실천하였던 것이다. 오십 줄에 이르러 도산은 이러한 자기 식의 ‘인간의 길’을 대공주의大公主義라는 사상으로 정리하게 된다.

하지만 안창호의 애국 사상과 대공주의는 단순한 피에타스 사상이 아니라 역사적 맥락을 지니는 것이었다. 그 사상은 일제의 압제에서뿐만 아니라 조선의 왕정제와도 철저히 단절하여 만민이 평등한 권리를 누리는 새 나라, 민주국가로 이행해야 한다는 사상이었다. 왕정국(조선)과 황정국(대한제국) 그리고 일제 강점기를 이어 경험했던 민족은 안창호 사상을 통해서 대한민국이라는 민주공화국으로의 이행을 준비할 수 있었다고 말해야 할 정도다. 그도 그럴 것이, 1941년 임시정부의 건국 기본이념으로 채택됨으로써 제헌 헌법과 현행 헌법에 그 자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조소앙의 삼균주의도 사실상 안창호의 대공주의와 맥을 같이 하며 이를 다듬은 것이었다.

안창호가 대공주의를 처음으로 이야기한 것은 중국 상하이에서 유일독립당 결성 운동을 하던 1927년, 그의 나이 50세 때로, 그 뒤 조소앙 등과 함께 만든 한국독립당의 정당 강령에도 대공주의를 반영하게 된다. ‘대공大公’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전 민족공동체의 공공이익을 뜻한다. 개인은 여기에 봉사함으로써 참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 당면한 한민족의 공공이익은 일제로부터의 해방(민족평등), 정치활동, 경제활동, 교육에서의 평등을 통해서 구현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안창호의 대공주의였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건대 안창호의 입장은 확실히 돌올했다. 잘 알려진 바대로 그는 실력을 중시했지만, 그 실력에는 인간 정신의 실력, 인격의 능력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가 보기에 일제로부터 해방되어 독립국이 되는 것보다 다급한 일이 있었다. 그건 민족의 격 자체를 향상시키는 일, 민력을 강화하는 일 또는 한민족이 새로운 민, 신민新民으로 거듭나는 일이었다. (신민주의, 민족 내부혁명주의) 또한 이념, 계파, 파벌로 분열하는 민족의 고질병을 극복하고 대공을 위해 모든 개인이 연대하는 삶을 살자고 했는데 (통합주의, 대공주의) 이것도 독특했다. 온갖 ‘빠’들이 준동하며 민족 고질병인 ‘자기파 옳음’에 집착하는 오늘의 현실에서 안창호 사상이 큰 울림을 갖는 이유다. 아직도 우리는 안창호를 살고 있고, 또 안창호를 다 살고 있지 못하다. (한겨레21, 1147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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