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식 이야기 (4)-파인 다이닝과 동식물

 

우리가 다 잘 아는 사실이지만, 먹는 일은 정말 즐거운 일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의 즐거움과 육체의 즐거움을 나누고, 육체의 즐거움 가운데 최고의 즐거움은 ‘접촉touch’에서 나온다고 말했어요. 무엇이 접촉일까요? 음식 그리고 섹스가 바로 접촉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합니다. 2400년 전에도, 식탁은 즐거움의 절대 장소였던 모양입니다.

 

그렇지만, 고대 그리스 시대와는 다른 현대의 특징도 있죠. 미식가 층의 확대라는 특징입니다. 한국의 경우도 지난 10여 년 간 미식에 대한 관심이 폭증한 느낌이에요. 맛의 미학, 감촉(심각)의 미학 그리고 시각적 미와 후각적 미. 지금 수많은 이들이 식탁에서 이런 미학을 추구하고 있지요. 집에서 이런 미학의 구축이나 실현이 어렵다면, 근사한 레스토랑, 카페, 베이커리를 방문해서 이런 미학을 ‘구매’하고 있고요. 특히 저 4대 미학 중에서 맛의 미학은 우리 시대에 ‘미의 천황’이어서, 맛의 미묘한 차이를 찾아내는 맛의 감별사는 안방의 최고 스타가 되었습니다.

 

인간의 미적 생활과 감각, 무엇보다도 인간의 혀와 심미의식이 진화해가는 인간 진보의 풍경인 걸까요? 그런 것 같기도 하지만, 과연 이것이 인간의 진보인지는 의문입니다. 30층 이상이 넘어가는 고층 아파트 주택, 100층이 넘어가는 마천루를 보면서, 저것이 과연 삶과 문명의 진보인 걸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과 똑같은 심정인 거죠.

 

의문이 드는 이유는 많습니다. 너무나 많아서, 오늘은 딱 한 가지만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보다 더 파인할 수 없다 싶을, 최고의 파인 다이닝(fine dining)에는 한 가지 중대한 요소가 깃들어 있습니다. 그건 바로 음식과 그 원천 간 간격의 최대화라는 요소이지요. 이것을 저는 ‘최대 거리두기’라고 부릅니다.

 

무엇이 음식의 원천인가요? 물론 자연계이자 자연계가 삶의 터전이 되는 여러 동식물입니다. 자, 여기 케잌 한 조각이 있습니다. 이것은 동물인가요, 식물인가요? 우리는 이것을 동물로도 식물로도 인식하지 않죠. 이처럼 우리가 케잌을 ‘음식’이라 부르고 동식물과는 다른 고유한 물질 형태로 범주화하면서, 우리는 동식물의 생체가 변형된 그 물질과 그 본래 형태인 동식물 사이에 놓인 다리를 절단합니다. 이러한 절단과 함께, 그 물질은 인간만의 고유 영역, 즉 문화의 영역으로 이동되지요. 그러니까 세상의 모든 디쉬는, 케잌은, 그리고 ‘음식’이라는 개념 역시 일종의 ‘문화화’의 결과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문화화’에는 중대한 결과물이 있어요. 그 물질의 본래적 성질인 동식물성이 우리의 감각 체계, 인식 체계, 사고 체계에 희석된다는 것입니다. 케잌 한 조각을 구성했던 닭의 알, 즉 닭이 자기 자식으로 낳은 것, 소의 젖, 즉 소가 제 새끼를 먹이려고 생산한 것, 자기 스스로를 재생산하기 위해 햇빛과 물과 탄소를 먹고 자라온 밀과 사탕수수 등, 특정한 생물, 그들의 생산물과 삶은 케잌이라는 문화적 생산물 앞에서 거의 환기되지 못하지요. 그리고 다양한 동식물들이 성분으로 들어갈수록, 요리의 기법과 공정이 복잡할수록, 그리하여 식탁 위 식물食物의 풍미風味가 미묘할수록, ‘거리두기’는 더 잘 되고, 생물 환기는 더 안 됩니다.

 

파인 디쉬의 파인한 성질, 즉 세련성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그 디쉬는 동식물만이 아니라 농지·농사와도 거리가 멀어집니다. 케잌은 농산물인가요, 농산물이 아닌가요? 케잌이라는 단어와 농산물이라는 단어는 너무나 거리가 멀어서 이런 질문 자체가 우습게 들리지만, 케잌은 당연히 농산물입니다. 케잌은 달걀, 우유, 밀가루, 설탕 등 농산물의 조합일 뿐이죠. 케잌만이 아니라 커피도 농산물이고 아이스크림도 농산물이지만, 스타벅스, 베스킨라빈스와 농지 간의 거리가 너무 멀다 보니, 또 우리의 사고 체계 속에서 음식과 농지가 서로 분절되어 있다 보니, 이것들이 마치 농산물이 아닌 양 생각되고 있어요. 어떤 소에서 젖이 생산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카페라떼도 전혀 마실 수 없지만, 카페라떼를 마시며 어떤 어미 소를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파인 디쉬와 동식물, 농지·농사 간의 거리. 이 거리가 멀어지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개념이 있습니다. 자기의 삶의 터전에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던 어떤 생명체를, 인간을 위한 생산물의 소재·재료·원료로 환원하는 개념인 ‘식재료’라는 개념입니다. 달걀은 한 편으로는 어느 생물이 어떤 특정한 생태 조건 속에서 낳은 제 새끼이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오므라이스라는 요리의 재료가 됩니다. 하지만 달걀이 지닌 전자의 측면은 ‘식재료’라는 말이 우리의 귀에 들리자마자 곧바로 우리의 머릿속에서 사라져버려요. 식재료로 달걀이 인식되자마자, 어느 닭이 번식을 위해 제 알을 품었던 시간과 노력의 가치, 그리고 그 알 자체의 가치는 우리의 사고 체계에서 실종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음식의 미학을 즐기고 예찬하는 데 급급한 사람들, 파인 다이닝, 파인 디쉬에 미쳐 있는 사람들에게 일체의 도덕적 부담을 없애주는 중요한 개념이, 제 생각에는 ‘식재료’라는 개념이에요. 어느 생명체의 생산물인 알과 젖이, 밀과 사탕수수라는 생물과 그 부산물이 생산과 가공, 미적 창조의 ‘재료’로 환원되는 한, 그들의 생명을 끊고 요리하고 먹는 이들의 마음은 언제든 편안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고개를 한쪽으로 획 돌려버리는 것입니다. 생물이 살았던 삶의 터전에서, 농지에서 고개를 돌려 식당(주방) 또는 식탁이라는 공간에만 시선을 두는 것입니다.

 

파인 다이닝이 잘못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문화화’가 잘못되었다는 말도 아닙니다. 미식을 반대하는 것도 아니에요. 저 역시 ‘문화화’의 결과물인 음식 없이는 살아가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 ‘문화화’의 결과물에서 문화의 더께를 한 꺼풀 벗기면, ‘식재료’에서 ‘재료’라는 이름을 걷어내면, 거기에서 우리는 자기 고유의 삶을 살아갔던 어떤 생물을, 생명체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정말로 음식을 즐길 수 있으려면, 마음에 한 점 껄끄러운 마음 없이 그 음식을 입에 넣을 수 있어야 해요. 그런데 그건 그 음식물이 한때는 독자적 삶의 주체였다는 사실을 우리 스스로에게 은폐하는 게 아니라 거꾸로 드러냄으로써만 가능합니다. 즉 그 음식의 동식물성을 우리 스스로에게 환기함으로써만 가능합니다.

 

요컨대, 생각하며 먹어야만 비로소 즐거울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카페라떼의 향기에서 커피나무와 소의 젖과 사탕수수를 환기할 때, 테이블과 농가를 연결 지을 수 있을 때, 그때 우리는 비로소 그 동식물의 삶과 죽음에도, 삶과 죽음의 방식과 정황에도, 농지와 농가에서 일어나는 일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자연스럽게 비폭력 농업, 비폭력 음식이라는 주제에 빠져들 수 있습니다.

 

인간의 관심은 늘 즐거움에 있지만, 실은 즐거움이야말로 인간이 지향해야 좋은 지고의 가치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니코마코스 윤리학(The Nicomachean Ethics)>에서 강조했듯, 즐거움은 완전함과 관련된 가치입니다. 즐겁다면 이미 완성된 것입니다. 즐거움은 시간의 구속을 받는 과정이 아니라 시간에서 벗어난 도달입니다. 또한 프레데리크 그로가 말했듯 “자유의 확인”입니다.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

 

그러나 심신이 모두 즐거워야 즐거움다운 즐거움입니다. 먹어야만 신체의 즐거움의 뼈대가 세워진다는 진리와 더불어, 우리는 늘 먹는 즐거움을 지향하고 살아가고 있지만, 생각과 탐구, 앎과 실행으로 심신 모두가 즐거운 비폭력 식사라는 오솔길로 접어들지 않는다면, 언제든 가짜즐거움의 포로가 되고 말 겁니다. 자신의 폭력에 무지한 채, 생각 없이 즐기는 일의 노예가 되는 일 말입니다. 만일 이런 사람이 지금 파인 다이닝을 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아마도 이 세상에서 가장 파인하지 않은, 즉 가장 조악한 사람일 겁니다.

 

끝으로 ‘문화화’의 더께를 걷어내는 데 도움을 주며, 파인 다이닝과 동식물 사이에 벌어진 거리를 좁혀주는 글을, 우리를 ‘생각하며 먹는’ 소로小路로 이끄는 글을 한 편 소개합니다. <마이뜨리 우파니샤드>에 나오는 글입니다. 이 글에 암시된 것처럼, 우리 모두는 생명의 한 그물에 묶여 있고, 이 묶임의 진리가 가장 잘 확인되는 곳은 바로 식탁입니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이 모든 생명체들은 음식물로부터 태어났다. 그리하여 생을 마칠 때까지 음식물을 먹고 살아가다가 마지막에는 다시 음식물로 돌아간다.” (<인디고잉>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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