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사람들-가와구치 요시카즈

 

지난 70여 년간 한국 사회가 급변해왔다는 말은 싱거운 말이지만, 그 급변의 한 가지 핵심이 농업 기반 사회에서 산업 사회로의 대대적 이동이었다는 사실은 새삼 곱씹어볼 만하다. 산업자본주의 체제로의 재편이라는 전 사회적 변전의 과정에서, 우리 중 거의 모두가 대단히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역사가 삼켜버린 그 무언가를, 나는 아주 간결하게 ‘농심農心’이라 부르고자 한다. 농지가 이 삶에 중요하다는 생각과 감성, 우리를 살리는 먹거리가 신비로운 자연계의 힘으로만 이 세계에 출현 가능하다는 믿음과 감각, 대자연과 농지를 경외하지 않으면 도저히 살아갈 수 없다는, 몸에 밴 생각 말이다. 농심이 각자의 마음자리에서 소실되면서, 농촌이나 농지가 없어도 도로와 항만과 유통 시스템만, 마트와 편의점만 있으면 먹고 살 수 있다는 환각이 도시인의 머릿속에 자리 잡았고, 수천 년 역사의 구조물들인 농업과 농지 그리고 농촌 경관을 깔보는 기이한 풍토 역시 형성되었다.

이러한 농업·농촌 경시 정서의 뒷면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건 물론 기술제일주의에 정향된 맨털리티다. 한국은 세계 최초로 정부가 GMO 쌀을 주도해서 개발하는 진기록을 세우고 있는데, 이 역시 기술력으로 원전을 안전하게 유지할 수 있다는 식의 사고방식인 기술제일주의의 분비물에 다름 아니다.

스마트폰에, 뉴 테크놀로지에, 유전자변형기술에 열광하는 이 시대 주류의 정신은 그러나 과연 굴절될 수 있을까? 과연 우리의 마음자리에서 농심이 회복되는 일이 가당한 일이기는 할까? 굴절과 회복의 계기는 어른들의 얼굴이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는 갓난아기들처럼 우리들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음식이다. 먹는 한 누구라도 동식물과, 그들의 삶터인 농지와 계속해서 만날 수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먹는다는 것은 곧 농가의 자연계에 접속하고 의존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광화문의 집회에서 우리가 역사에 감싸이듯, 먹는 순간 우리는 농지에 감싸이기 때문이다.

그렇긴 하지만 우리에게서 정녕 농심이 되살아나려면 농촌과 농업의 현장 역시 현재의 몰골이어서는 안 되지 않을까? 정말 좋은 먹거리(생물과 농지, 대자연을 대상으로 한 해악이 없거나 최소화된 비폭력 먹거리)가, 행복한 삶이 이 지상에 가능함을 보여주는 농가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내면의 영혼이, 생명이 깃든 육체가 농사에 바탕을 둔 생활의 근사함, 즐거움”을, “우리 몸 안에 잠자는 3세대 과거, 10세대 과거, 100세대 과거…가 자연계에 몸을 두고 논밭에 서서, 벼들과, 채소들과 함께 사는 기쁨을” (<가와구치 요시카즈의 자연농교실>) 만인에게 보여주는 농가가 우리의 눈앞에 있어야 하지 않을까? 화학비료, 농약, 기계, 산업시설을 동원하여 자연계에 부담을 떠넘기는 폭력적 농업과 축산업을 극복한 모델이 지금 여기,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일본 나라 현 사쿠라이 시에서 자연농을 실천하고 있는 가와구치 요시카즈(1939~)의 삶은 이런 화두를 드는 이들에게 퍽 훌륭한 가이드가 되어준다. 특히 최근 출간된 <가와구치 요시카즈의 자연농 교실>은 말로만 듣던 자연농이 (적어도 소농가의 형태로는) 가능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당당히 보여주며, 비폭력 농업, 비폭력 먹거리, 자급을 향한 우리의 꿈과 사유를 촉진한다. 이 책은 가와구치 씨의 농가 그리고 그가 운영하는 학교인 아카메 자연농숙을 방문해 그의 자연농 철학과 기법, 농사짓고 먹고 사는 모습을 취재하고 정리한 결과물로, 성격상 작물 재배 실용서에 가깝지만 앞쪽에는 자연농의 원칙도 더불어 소개되어 있다.

자연농이란 무엇인가? 생물다양성을 스스로 지켜가는 자연의 이치를 알고, 그 이치에 맞게 짓는 농사를 말한다. 이것을 가능케 하는 네 가지 원칙이 있으니, 무경운, 무제초, 무농약, 무비료가 바로 그것이다. 무경운이란 땅을 갈지 않는다는 것. 그렇게 하면 풀뿌리에 의해서 흙이 부드러워지고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흙이 기름지게 된다고 한다. 무제초란 풀과 작물이 같이 자라도록 하되, 씨앗을 뿌릴 곳에만 풀을 낫으로 베어 풀 멀칭mulching을 한다는 것. 즉 완전무제초가 아닌 부분무제초다. 이렇게 하면 그 풀들로 된 부엽토층이 생기고, 거기에 풀에 깃들어 사는 소동물의 주검이 함께 쌓임으로써 ‘주검의 층’이 형성돼 땅을 비옥하게 한다. 물론 농약이나 비료도 일절 쓰지 않고, 오직 이런 식으로 살아난 양토의 지력에만 기대는 농법이 바로 자연농법이다.

가와구치의 자연농은 후쿠오카 마사노부(1913~2008)가 시작한 자연농을 이은 2세대 자연농이지만, 약 10년의 실험과 실패 끝에 스스로의 힘으로 자연농을 터득했다는 점, 그리고 그 방법을 학교를 통해 보급하고 있다는 점에서 독자적이다. 사실 그는 단순히 농부가 아니다. 교육자이자 화가이기도 하다. 아니, 이런 통속적인 지시어로는 그의 실체가 거의 잡히지 않는다. 그는 ‘자립의 예술가’다.

그는 왜 자연농이라 불리는 ‘자립의 한 예술장르’에 빠져들게 된 걸까? 재미나게도 그를 자연농법으로 이끌었던 건 다름 아닌 농약이었다. 삼십대 중반, 병을 얻었는데 원인이 십대 후반부터 늘 논밭에 손수 뿌리던 농약에 있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가와구치가 태어난 해는 1939년,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던 해였다. 즉, 그는 패전 후 일본이라는 어두운 사회에서 유년기를 보냈는데 전쟁에서 패배했다는 정신적인 어둠 그리고 경제적인 어려움이라는 어둠이 그의 어린 시절을 지배했다. 더욱이 그는 농가의 장남으로 태어나 농업이라는 가업을 이어가야만 하는 운명이기도 해서, 어린 가와구치를 둘러싼 어두움은 삼중의 어두움이었다. 그리하여 초등학교 6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3년 뒤부터는 학업을 중단하고 전업 농부가 된다. 그의 선택이 아니라 그의 가계가 정해놓은 운명이었다.

당연히 소년 가와구치에게 농사는 하기 싫지만 해야 하는 무엇이었다. 언제나 관건은 수고로이 몸을 부려 생계를 유지하는 일이었다. 따라서 1950년대 후반 (이때 그는 십대 후반이다) 농약이 마을에 도입되었을 때, 그와 어머니의 선택은 단호할 수밖에 없었다. 기계와 농약의 힘으로 몸을 편하게 하고 소출을 늘릴 수 있다는 건 혁명이었다. 인류가 20세기에 경험한 농업의 역사가 가와구치의 삶에 표본으로 담겨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꿈의 동물이어서, 농사가 싫어 그림을 그리던 소년 가와구치의 일상은, 화가가 되겠다는 꿈으로 변신하게 된다. 예술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오사카에 있는 텐노지 미술연구소에 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한마디로 그의 이십대는, 세계의 숱한 이십대에게 그러하듯, 길찾기의 시간이었다. 농사는 기계와 화학제품에 맡겨버리고 몸이 농약에 아주 천천히 망가져가면서, 때가 되면 농촌을 영영 떠나 도시에서 예술가로 살아가려는 포부를 품고서 농가와 도시를 시계추처럼 오가며 지내던 청년이 거기 있었다.

이 모든 혼란의 구름들은 서른 즈음에 그의 삶에서 차분히 가라앉게 된다. 그는 이 깨달음의 순간을 이렇게 토로하고 있다.

 

“그와 같은 날들을 보내던 서른 살 무렵의 10월, 벼베기를 위해 관동 방면에서 교토를 거쳐 전차로 야마토 분지로 들어서자 차창에 논이 펼쳐지고 황금색으로 물든 풍경이 나타났습니다. 그 풍요로운 경치에 마음이 고동치며 ‘여기가 나를 살리고 있다’, ‘여기야말로 평화가 있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이 여행을 마지막으로 이제 여기를 떠나는 것은 그만두자. 이제부터는 정주의 날을 보내자’라고 결심했습니다. ‘여기에서 평생을 살아가자’라고.” (<자연농, 느림과 기다림의 철학>)

 

이것은 몸의 정주 이전에 마음의 정주였고, 이 정주는 실은 비상이었다. 이것이 그의 삶의 1단계 도약이었다면, 2단계 도약은 이로부터 8년 뒤에 일어난다. 삼십 대 중반, 약 20년 동안 농약에 노출되었던 몸에 병이 깃들었고, 뭐랄 것도 없이 자활의 길로 들어선다. 그가 원한 것은 단순한 것, 즉 병으로부터의 자립이었다. 그리고 그 시작은 농약의 근절, 자연농으로의 전환이었다. 38세 때의 2단계 도약이다.

하지만 전환을 결심하자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 있었다. 그건 고난이었다. 아이 셋이 태어나 식구가 여섯으로 늘어났지만 벼도 채소도 제대로 자라지 않아(벼는 3년 후, 채소는 10년 후에 수확되었다) 지독한 경제난에 시달려야 했던 것이다. 38세에서 48세에 이르는 이 10년의 실험기에 그는 집에 있는 것을, 심지어 농지까지도 팔면서, 또 나중에는 종묘회사에 취직을 해서 근근이 연명하며 버티고 또 버텼다.

가와구치 요시카즈라는 사람의 빛, 그 빛의 덩굴은 바로 10년의 버팀에 있다. 그가 이 고난의 길을 10년 간 걸을 수 있게 한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후쿠오카 마사노부, 오카다 모키치 같은 선배들의 경험담도, 가족의 존재 자체가 주는 행복도 한 몫을 했겠지만, 가와구치 특유의 자신감과 신념이 더 큰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우리에게 감동으로 다가오는 것은, 그의 자연농법만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아름다운 삶과 예술이 무엇인가에 대한 그의 명철한 관점이자 자연농을 하는 동안 길러졌을 그의 견고한 생명관과 인생관 그리고 농심이다. 그는 자신만이 간직했던 버팀목의 실체를, 자급과 더불어 삶의 안식을 얻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버팀목이 되어줄 그 버팀목의 실체를,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그렇다고 굶어죽지는 않을 것이다, 바른 것, 진정한 것, 아름다운 것, 선한 것,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있으면 반드시 살아나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바른 것을 하는 능력을 몸에 익히고는 사람으로서 성실하고 솔직하고 겸허하게 살면 자연이 살려줄 것이고, 사람도 내버려두지 않고 틀림없이 살려줄 거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했습니다.” (<자연농, 느림과 기다림의 철학>) (<한겨레21>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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