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는다는 것, 그리고 지속 가능한 농업

전도된 식의 시대와 음식지능

지금 우리는, 지난 시대와는 다르다는 의미에서 ‘식食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향미 좋은 요리, 퀄리티 높은 음식을 찾는 일이야 인류의 본성에 가깝겠지만, 그것을 추구하는 정도가 도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향미 좋은 음식이, 음식관의 부재와 함께 추구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상 ‘무엇이 좋은 음식인가’를 묻는 논의의 자리는 지금 이 나라에는 텅 비어 있다시피 한데, 이런 비극을 가장 잘 보여주는 건 다름 아닌 ‘맛집’이라는 검색어다. 이 초라한 단어가 ‘음식의 향미, 영양과 퀄리티, 신선하고 건강함, 좋고 훌륭함’ 등 음식과 관련된 중대한 가치들을 포섭하고 있는 현실 말이다. 판소리 <수궁가>에는 동물들의 대장을 뽑는 회의 장면이 나온다. ‘맛집’이라는 검색어 왕의 승승장구는, 여우나 토끼가 범을 제치고 동물 무리의 대장 노릇을 하고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무엇이 좋은 음식인지에 관한 인식과 태도가, 지금 이 나라에서는 크게, 뒤틀려 있다.

이 ‘뒤틀림’이라는 문제의 핵심에는 두 가지 사실이 있다. 하나는, 이 나라의 대다수 사람이 생산자·공급자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한 채 먹고 있지만, 먹거리에 관한 정보를 제대로 인지하지 않은 채(이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은 채) 또는 그 정보를 충분히 제공받지 못한 채, 밥상을 차리거나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 다른 사실은, 이들의 의식 세계에서, 식과 생명, 식과 농農(농지와 농지의 생물다양성과 농법과 농민)이 심각한 수준으로 분절되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렇다는 건 곧, 음식을 전체적 시각에서 알아보거나 느끼지 못하고, 일면적 시각에서만, 이를테면 맛과 영양 차원에서만 알아보거나 느낀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식의 앎과 시각의 궁핍을 한번 당연시하게 되면, 그러한 사태는 다음의 궁핍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져서 악순환이 지속된다는 점이다.

음식지능(Food Intelligence/Food Literacy)의 제고는 그래서 지금, 중요하다. 음식지능이란 음식에 관한 전반적인 지식(앎) 그리고 좋은 음식을 알아보는 능력, 식물食物을 다루는 능력을 뜻한다. 그러나 더 구체적으로는 어느 음식(또는 요리)의 물리적·생물적·생태적 성격, 사회경제적 효과(예컨대, 페레로 로쉬 제품의 소비가 코티드부아르 카카오 농장의 아동 노동에 미치는 효과), (전통)문화적 맥락과 가치, 영양적 가치(필수영양소의 함유 정도), 음식과 농생태계·농법과의 관계, 음식(생산·유통·소비)의 생태·생물 효과(예컨대, 팜 오일 함유 제품 소비가 지니는 인도네시아 열대림 축소라는 효과, 팜 오일의 이동 거리인 푸드 마일리지, 육질 좋은 소고기와 성장촉진사료·호르몬을 투여 받은 소의 복지와의 관계 등), 음식과 내 체질 간 궁합의 정도, 생물의 성질에 맞게 요리하는 법, 음식 맛을 감별하고 즐기는 법, 이 모두가 음식지능을 가늠하는 지표가 된다. 뭐라고? 이렇게나 많이 알아야 한다고? 사실 이 모든 분야에서 지식과 능력을 쌓아나가야, 좋은 음식을 선택하고 음미하는 일이 실제로 가능해진다. 또한 그럴 때에야 비로소, 좋은 음식이란 어떤 음식인지가 우리의 시야에 분명히 드러나며, 먹는다는 것의 의미 역시 우리에게 일부나마 해명될 것이다.

 

먹는다는 것의 의미

먹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먹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하는 것인가? 우선, 이 활동은 피부조직 바깥에 있는 어떤 생명 에너지를 피부조직 안쪽으로 집어넣어 (자기) 생명을 재생시키는 생명 활동 중 핵심이 되는 활동이다. 인간은 다른 모든 생명체처럼 이 같은 방식의 ‘외부外部의 내화內化’를 통해서만 스스로를 재정립하는데, 이러한 부단한 자기 재정립이야말로 우리 실존의 실상이라고 할 수 있다. ‘외부의 내화’를 ‘내외상합內外相合’이라는 말로 표현해도 좋다. ‘먹기’란 내외를 상합케 하는 생명 활동 가운데, 입에서 일어나는 단계의 활동을 지시하는 말이다. 입은 인간이라 불리는 어느 이상한 동물의 얼굴에 달린, 다른 생명을 빨아들이는 빨대이며, 현대인의 한 가지 문제는 이 빨대가 다른 생명을 지나치게 많이 빨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먹기’에는 중대한 효과가 있다. 그건 바로 ‘임시적 구원’이다. 우리는 숨 쉬는 만큼만, 먹는 만큼만 임시적으로 (산소와 영양분을 빨아들여, 우리 인체의 엔트로피의 증가를 방지·연기하며) 생물로서, 미적 조형물로서, 또는 미적 생물 형태로서 구원 받는다. 굶주림의 고통과 피로, 불쾌감, 영양실조, 질병, 아사라는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는 것, 또는 그러한 인간적 곤경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것 역시 ‘먹기’라는 기초 행위가 아니면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내 삶의 구원자는 밥상 위에 와 있는 그 생명물질이 아닌가?

그러나 밥상 위의 그 구원자는 단지 어느 동물과 식물의 살점일 뿐일까? 그것은 단순히 어느 조리사의 창의적 작품만도 아니고, 다른 생명체만도 아니다. 거기에 와 있는 건, 그걸 길러냈던 농부의 노력이나, 식생명을 식품으로 바꾸고 유통했을 식품유통기업의 활동만도 아니다. 또한 거기에는 단순히 어머니 지구가 와 있는 것만도 아니다. 우리가 잘 모르고 있고, 알더라도 잘 기억하고 있지 않은 사실이지만, 거기에는 태양이 와 있다. 그러나 단순히 태양이 아니다. 거기에 와 있는 건, 우리가 아는 유일한 생명의 단위인 태양-지구생물권이라는 ‘온생명’이다. 그리고 태양광자를 받아 지구 생명의 지속을 아래에서부터 지탱하고 있는 지구생태계의 실력자들, 초록빛의 초목들이 와 있다. 말을 못한다며, 움직이지도 못한다며, 도덕적 능력도 없다며 우리가 깔보고 있는 그 풀들, 나무들 말이다. 우리는 우리의 무지無智라는 어둠을 스스로 걷어내고, 음식에서 곧장 광합성을 봐야만 한다. 그래야 요리가 무엇이고, 먹는다는 게 무엇인지를, ‘누가’ 우리의 구원자인지를 조금이나마 알 수가 있다.

달리 말해 본다면, 먹는다는 건 우리 자신도 모르게 농지(생산지)에서 구현되고 있는 온생명에 접속한다는 것, 세상 모든 먹이(먹거리)의 시발점인 광합성 활동과 만난다는 것이다. 육지만으로 시야를 한정해본다면, 작물(초)과 과실수(목)의 광합성은 태양, 기체환경, 물환경, 엽록체가 연주하는 4중주 협주곡이다. 쌀 한 톨, 귤 한 알은 태양광자, 기체환경의 탄소분자, 물환경의 물분자, 표토환경의 다양한 유기분자, 수분매개자의 활동이라는 5대 생태과정과 농사라는 제6의 요소가 결합되어 나온 6중주 협주곡의 결실이다. 눈을 씻고 다시 보면 이만한 작품도 드물다.

먹기가 온생명에의 접속이라는 건 곧, 먹는 이는 누구라도 어린이가 되어 먹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실 세상의 모든 밥상은 어머니들이 와 계신 자리여서, 따뜻하다. 조리사, 농부, 그리고 농지-대자연 또는 농지-온생명이라는 어머니 말이다. 밥상에 앉는다는 건, 다시 어린이가 된다는 것이다.

먹기는 구원받으려는 활동이기도 하지만, 구원받으라는, 살려 하는 자율적 생명기계의 심층 어딘가에서 내지르는 소리에 나 자신도 모르게 응답하는 활동이기도 하다. 즉, 먹는다는 것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는, 살아가려는 선택이다. 그리고 나의 전 조상들이 했던 동일한 선택을 다시 함이기도 하다. 지금 밥상에서 ‘누가’ 먹고 있는 걸까? 나의 몸까지 물결쳐온 전 조상들의 살고자 했던 뜻이, 그들이 살아가려 했던 선택이, 그 뜻과 선택의 총합체가 먹고 있는 것이 아니던가?

먹기는 앞서 살았던 수많은 세대들이 가꾸고 전해준 아름다운 식문화, 맛문화를 껴안고 우리네 삶의 뜰에 부활시키는 행위이기도 하다. 밥상이야말로 문화와 예술의 전당이다. 요리 자체가 자연을 소재로 한 일종의 자연예술이지만, 생명과 땅의 고동을, 우리 자신의 생명의 고동을 생각하고 느끼며 명상적으로 먹을 때, 틱낫한 스님의 말 그대로, 그러한 행위는 이팅 아트Eating Art가 된다. 감각적 예술과 정신적 예술, 이 두 예술이 동시에 가능한 자리, 자연과 인공[인간], 자연과 문화예술이라는 억지 이분법이 결코 통하지 않는 자리. 밥상의 자리는 바로 그러한 자리다.

 

지속가능한 농업에 투표해야 하는 이유

밥상은 투표 현장이기도 하다. 먹는다는 건 늘 특정 방식으로 생산된 먹거리를 먹는다는 것인데, 이는 곧 먹기의 선택이 특정 방식의 생산법을 지원하는 선택임을 뜻한다. 매 끼니의 식사는 곧 농법과 생산자에 대한 투표 행위이며, 무언가 (요리하고 구매해서) 씹을 때마다, 사실상 우리는 투표를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곧 생산자였고 생산법도 단일해서 이 투표가 쉬웠던 시절이 있었지만, 불행히도 우리는 오늘날 이 투표가 매우 어렵고 또 중차대한 시절을 살아가고 있다. 우선, 미국처럼 거대 농기업이 대규모로 산업농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화학물 집약적이고, 화석연료 집약적인 화학농을 하는 이들이 여전히 이 나라에는 많고, 화학농이 초래하는 생태적 비용과 폭력이 어마어마한 수준이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는 이 생태적 비용을 농산물·식품 가격에 포함시키고 있지 않는데, 그렇다는 건 모종의 부담을 미래세대와 생태계에 떠넘기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

하지만 화학농이 초래하는 생태적 비용과 폭력이란 정확히 무엇인가? 우선, 화학농이 전 지구적 기후 변화에 기여하는 바가 전체의 40%나 된다. 농기계를 돌리고 시설을 유지하고 화학비료와 곡물사료 등을 제조하는 과정에서 화석연료를 계속해서 연소하기 때문이다. 화학농은 지속 가능한 농업의 기반 자체인 농지의 생물다양성을 해치며, 토질을 악화시키고 표토의 소실을 초래한다. 나아가, 제초제와 화학비료(질소비료의 질소는 물, 산소와 만나면 질산염으로 바뀌어 물에 쉽게 용해된다.)의 오염물질들은 지표수, 지하수로 농축되어 하천생태계와 해양생태계를 오염시키고, 식수를 필요로 하는 우리 인간의 건강을 위협한다.

투표가 어렵게 된 건, 결정적으로는 지난 20년간 세계의 농업과 식산업 체계가, 화학농을 주도하는 초국적 기업들의 지배체계로 재편되는 과정(세계화)을 겪어왔기 때문이다. 현재 화학농을 하는 초국적 거대 농기업(종자·곡물 기업), 식음료를 가공, 유통하는 초국적 식품 콘체른은 지구 생태계만이 아니라 가난한 나라에 사는 약자들의 웰빙마저 망치고 있다. 더욱이, 국내의 먹거리, 농업, 축산업 시장을 잠식하며, 한반도의 농생태계를, 소규모 농가의 생계를, 식자食者인 우리 소비자들의 건강을 위협하고 있다. 일례로 세계 5대 곡물 대기업 중 하나인 카길Cargill은 카길 코리아를 설립해 국내 곡물시장 및 사료시장을 지배하려 하고 있는데, 곡물시장 내 이들의 확장은 소규모 쌀농가의 위축을, 사료시장 내 이들의 확장은 육류를 소비하는 한국인들의 건강이 (인체에 미치는 효과가 불명확한 사료로 인해) 위협 받는다는 것을 함의한다.

하지만 이건 빙산의 일각이어서, 국내 대형 마트나 편의점의 식품 코너에서 지금 우리는 식농의 세계화가 초래한 여러 문제와 대면해야만 하는 일대 ‘식란食亂’에 처해 있다. 돌, 치키타, 델몬트, 크래프트, 마스, 페레로, 몬산토, 신젠타, 듀퐁, 도우, 카길, ADM, 벙기, 루이스 드레퓌스, 펩시코, 다논, 네슬레, 테스코……제대로 투표하려면 이 수많은 자이언트가 무슨 일들을 해왔는지 알아야 하는 처지인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매우 쉬운 선택지도 있다. 그건, 양토 자체의 능력을 인정하고 생물다양성의 가치를 보듬으며 씨앗을 관리하는 농업, 그리하여 지속 가능한 농업인 생태 농업에 투표하는 것이다. 생태 농업은 모든 것을 지속 가능하게 한다. 우리의 건강을, 즐거운 밥상을, 농업(농지와 농민의 삶) 자체를, 농지를 둘러싼 더 큰 지구 생태계를…….앞서 구원자가 곧 밥상 위 생명물질이라 했지만, 이는 부족한 말이다. 오직 폭력식이 아닌 평화식만이 구원자이며, 평화식은 오직 생태 농업으로만 가능하다는 점에서, 생태 농업만이 우리의 구원자다. (<대산 농촌문화> 2017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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