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기] 고정희-님과 그리움과 나

고정희 <지리산의 봄-뱀사골에서 쓴 편지>-님과 그리움과 나

 

남원에서 섬진강 허리를 지나며 
갈대밭에 엎드린 남서풍 너머로
번뜩이며 일어서는 빛을 보았습니다
그 빛 한자락이 따라와
나의 갈비뼈 사이에 흐르는
축축한 외로움을 들추고
산목련 한 송이 터뜨려 놓습니다
온몸을 싸고도는 이 서늘한 향기,
뱀사골 산정에 푸르게 걸린 뒤
오월의 찬란한 햇빛이
슬픈 깃털을 일으켜 세우며
신록 사이로 길게 내려와
그대에게 가는 길을 열어줍니다
아득한 능선에 서 계시는 그대여
우르르 우르르
우뢰소리로 골짜기를 넘어가는 그대여
앞서가는 그대 따라 협곡을 오르면
삼십 년 벗지 못한 끈끈한 어둠이
거대한 여울에 파랗게 씻겨 내리고
육천 매듭 풀려나간 모세혈관에서
철철 샘물이 흐르고
더웁게 달궈진 살과 뼈 사이
확 만개한 오랑캐꽃 웃음소리
아름다운 그대 되어 산을 넘어갑니다
구름처럼 바람처럼
승천합니다

-고정희, <지리산의 봄-뱀사골에서 쓴 편지> <<아름다운 사람 하나>>(들꽃세상) 수록

*

장준하의 <<돌베개>>에는 임시정부가 있는 충칭을 향해 구만리 들길을 무작정 걸어가는 한국 청년 다섯 명이 등장한다. 그 중 하나는 청년 장준하다. 이들로 하여금 며칠 밤 며칠 낮 충칭을 향해 걷게 했던 힘, 이들을 살아가게 했던 것, 이들의 가슴 속에서 불타오르던 횃불, 그 북극성은 한용운이 ‘님’이라고 표현했던 것이기도 하다. 고정희의 시 문법은 한용운의 시 문법을 그대로 복사한다. 그것이 무엇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내가 찾아가는 곳, 나의 궁극적 지향처, 나를 이끌고 가는 건, 고정희의 언어로 하면, ‘그대’다.

그런데 이 시의 그대는, 알 수 없는 미소로 사라져버리는 먼 곳의 그대도 아니고, 가까이서 내 손을 잡아주는 그대도 아니다. 그 둘 다이면서, 동시에 그 그대는 갑자기 시인-발화자 자신이 되어버린다. 산을 넘는 동안, 몸의 어둠이 씻기고, 모세혈관에서 샘물이 흐르고, 살과 뼈 사이에서 꽃 웃음소리가 들리는 동안 벌어진 기적이다. 그러니 과연, ‘승천’이라는 말은 허언(虛言)이 아니다. 어느 필부의, 자기도 모르게 터져 나온, 선시禪詩다. 지리산의 저 능선에, 나도 몸을 옮겨 놓고 싶다. 그러나 장소가 승천의 여부를 결정한대서야, 어디 그게 승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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