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기] 정호승-서울역이 가르쳐준 것

정호승 <연꽃>-서울역이 가르쳐준 것

 

남대문과 서울역 일대가 
온통 연꽃으로 만발한 연못이었다는
서울시청 앞 프라자호텔 자리에
지천사라는 절이 있었고
그 절의 연못 자리가
바로 지금의 서울역 자리라는
그런 사실을 안 순간부터
서울역은 거대한 연꽃 한 송이로 피어나더라
기차가 입에 연꽃을 물고 남쪽으로 달리고
지하철이 연꽃을 태우고 수서역까지 달리고
진흙 속에 잠긴 인수봉도 드디어
연꽃으로 피어나
서울에 연꽃 향기 진동하더라

-정호승, <연꽃>, 전문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창작과비평사) 수록

 

*

 

195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서울에서 최소 몇 년은 머물렀던 사람들에게는 이런 치유의 시편이 귀중하다. 신사옥이 건축되기 전까지, 서울역은 얼마나 추레했던 곳인가! 그 앞의 사창가며, 잡상인이며 하는 너절한 풍경들은, 젊었던 나에게 안티-서울의 감정과 그 감정의 명분을 주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그리하여 나는 도시를 버리고 산으로 갔다. 깨끗한 물과 물소리, 새소리가 마음을 씻어주고 정결한 소반과 연잎차가 몸을 씻어주는 곳으로. 심지어 나는 할머니들이 내게 가르쳐준 언어도 버리고, 산에서만 통하는 이계의 언어를 쓰기 시작했다. 새로운 삶의 풀밭에 등을 누이고, 이것이 자유라고 느꼈다.

그러나, 아뿔싸, 내가 모르던 것이 있었다. 어린 시절은 인생의 온 세월을 흐르고, 과거와의 화해가 현재 내 평화의 지반이며, 연꽃이 아름다운 건 진흙밭에서 피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그걸 모르고 있었다. 이 시를 읽고 내가 그토록 염오했던 더러운 서울역의 풍경이 더는 싫지 않았다. 그 기억도, 그 기억을 공유한 이들도 더는 싫지가 않았다. 그러나 손쉬운 화해를 말하려는 건 아니다. 지평을 넓히면 답답한 것이 달리 보이고, 찾을 수 없었던 이유도 찾아지고, 할 일도 새롭게 보인다는 말을 하고픈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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