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탁과 철학(9)-소박한 삶, 소박한 식사(2)

 

모래알보다 많은 별들, 별들만큼 많지는 않지만, 무한하다 할 만큼 많은 우리 몸속의 박테리아들. 그리고 이 두 무한성의 주인공들을 서로 연결해주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음식이라고 부르고 있는 물질이다.

별이나 박테리아만큼은 아니어도 어마어마한 숫자의 사람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다. 세계식량계획(WFP)에 따르면, 2015년 가을 기준 배고픔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은 약 8억 명에 육박한다. 세계 인구 70억에 대비해보면 10%가 넘는 인구로, 경이로운 수치가 아닐 수 없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들 8억 인구의 몸무게를 모두 합친 것보다 수십 배 더 무거운 질량의 물질이(폐기되는 음식물이다.) 매해 생산된다는 것이다. 식량농업기구(FAO)에 따르면, 매해 폐기되는 음식물의 양은 생산되는 음식물 총량의 30%가 넘는 양으로, 13억 톤에 이른다. 그리고 이것의 가치는 미화 약 1조 달러, 한화로 환산하면 약 1000조에 해당한다. 한편, 세계보건기구(WHO)가 밝히고 있는 세계의 비만 인구수는 총 6억에 이른다. (2014년 기준, 2016년 여름 발표 자료)

음식물을 둘러싼 이러한 불균형과 모순 앞에서 우리의 고개는 저절로 갸우뚱해진다. 우리 인류는 과연 ‘호모 사피엔스’(지혜로운 인간)라는 이름을 부여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종일까? 한쪽에서는 버리느라 정신이 없고, 한쪽에서는 굶주려서 정신이 없고……외계생명체가 이곳을 관찰한다면 인류를 ‘호모 스투피두스’(어리석은 인간)라고 명명하지 않을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GMO 개발자들의 의견과는 달리 식량에 관한 한 생산량이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 무엇이 문제일까? 여러 문제를 하나로 싸잡아서 종자, 곡물,가공, 유통 (초국적) 대기업들이 지배하고 있는 작금의 푸드 시스템이 진원지라고 하면, 깔끔히 정리가 되는 것도 같지만, 아마도 이는 지나친 단순화일 것이다. 생산과 유통의 반대편의 소비 행위가 없이는 그 시스템도 가동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먹고 흘리고 버리고 싸는 지혜로우신 인간님들의 글로벌 푸드 컬처가 저 글로벌 푸드 시스템의 가장 아래에 있는 지반地盤이어서, 이 시스템 혁명은 소비 혁명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다.

지구의 식食 풍경이 무엇이든, 개체 생명체로서 우리는 각자의 소소한 자리에서, 매일 매일 찾아오는 배고픔이라는 절벽과 날이면 날마다 세워지는 비만·과식·식食 질병이라는 절벽 사이에 다리를 놓아야만 생존할 수 있는 처지에 있다. 그리고 이 부단한 선택의 요구와 이 요구에 응답하는 행동(선택)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성찰 대상에서 식食을 제외하게 한다. 살아온 대로 살아가려는 심신의 습관 가운데에서 식 선택의 습관이 가장 뿌리 깊은 곳에 자리를 잡고 있는 까닭이다. 사실 습관習慣이란 내 심신에 들러붙어 내 심신이 가장 자연스럽게 여기게 된 나의 활동(선택), 감성, 취향, 에토스(좋은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감성과 감각), 사고방식의 총체, 즉, 바로 나 자신이자 내 삶 그 자체이며, 나의 본질은 (식食 행위로) 다른 생물의 죽음을 내 삶으로 바꾸는 동물로서의 본질이어서, 식 습관만큼 고집이 센 습관이 또 있기 어렵다. 나를 바꾸고 삶을 바꾼다? 식 습관을 바꾼다면, 성찰 대상에 식食을 포함한다면, 정말로 삶을 바꾼 것이리라.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소박한(또는 간소한) 식사의 기본 줄기는 굶주림과 비만·과식·식 질병이라는 양 극단을 지혜롭게 회피하는 행복한 식사이지만, 물론 이것에만 국한되는 건 아니다. 그보다는 인체의 건강에 관한 조금 더 깊은 사려, 지구 전체의 일을 살피는 조금 더 전체적인 시각, 자유에 관한 조금 더 적극적인 관심, 이 세 가지 동력이 동시에 합류하여 세계에 분출시킨 시원한 삶의 분수噴水가 바로 소박한 식사라고 할 수 있다. 소박한 식사는 축제의 식사다.

우선, 소박한 식사는 체질식體質食과 소식小食을 아우른다. 자기 몸에 맞는 것을 찾아서 그것 위주로 먹되, 지나친 식사를 경계하며, 소반素飯 앞에서 기뻐한다면, 소박한 식사의 주인이라 할 만하다.

식食에서의 지나침, 사치식奢侈食을 경계하는 일은 곧 폐기되는 음식물, 즉 음식 클러터Clutter를 줄이려는 노력과도 포개진다. 요새 유행하고 있는 미니멀 라이프, 그 핵심은 클러터, 즉 불필요한 사물의 제거이지만, 배터지게 즐기고 나서 남은 것을 잽싸게 집 밖으로 옮겨 저 13억 톤의 괴물을 만드는 데 일조한다면, 그것으로 미니멀 라이프가 완성되는 걸까? 양심이라는 공간에 남을 클러터는 어쩔 생각인가?

지구 전체의 식 풍경을 살펴보는 일, 농지에서부터 마트까지 푸드 시스템을 통으로 살펴보는 일, 이마트, 홈플러스 등에 와 있는 기업들, 카길, 돌, 델몬트, 켈로그, 크래프트, 네슬레, 펩시코…들이 세계 곳곳에서 벌이고 있고 CJ, 농심, 롯데, 오뚜기, 진로, 파리크라상, 대상, 동서, 풀무원, 하림…들이 국내 각처에서 벌이고 있는 짓거리들을 알아보는 일은, 마음에 클러터를 남기지 않으려는 우리의 과업에 긴요하다. 각기 전문 영역은 다르지만, 이 기업들은 생산과정의 화학적 개입, 최초 생산물의 인공적 변형(합성화학물질 첨가 등의 화학가공)과 식품의 장거리 수송에 관계한다는 점에서, 그로써 지구자연과 인체자연간의 행복한 만남을 훼방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소박한 식사의 한 가지 면모는, 푸드 생산과 유통을 둘러싼 전체의 지형을 살펴보는 식사, 식탁 위에서 자연과의 적대관계를 해소하는 식사로, 그런 뜻에서 나는 이러한 식사를 살핌의 식사, 치유의 식사라고 부른다.

당연한 것인지 모르지만, 전체를 살피며 선택을 조정하는 일은 우리들 자신의 자유를 확보하는 일과도 포개진다. 자유란 자기 삶의 자기 지배이며, 대형마트 식품코너에서 우리가 만나는 건 우리의 삶과 몸과 즐거움을 지배하려는 기업들의 지배력이기 때문이다. 식사의 소박함이라는 사안은, 지배당하지 않고 지배하기, 소비주의라는 주류主流에 휩쓸리지 않기, 현재의 자본 질서 속에서 최대한도로 자율성을 확대하기라는, 자유에 관한 사안이다.

지나친 반주류反主流일까? 무엇이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즐겁게 먹으면 되는 걸까? 자유는 자기 지배만이 아니라 자기 지평의 확대라는 사안이기도 하며, 오늘날 이곳에 별과 박테리아만큼이나 많은 것은 바로 기업의 대차대조표, 그리고 마인드리스 이팅mindless eating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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