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탁과 철학(10)-여행과 음식

 

허기짐과 배부름은 일종의 변곡(變曲)의 현상이다. 허기짐이 변곡점에 도달해서 배부름이라는 또 다른 변곡점에 도착하는 시간을 우리는 식사 시간이라고 부르고 있다.

허기지는 일은 천천히 일어나는데, 이 과정은 일종의 이동 또는 표류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불만족이 생성되고 활성화되고 극대화되는 일련의 활동적 과정이기 때문이다. 반면, 허기짐을 해소함이란 여행자가 모항(母港)으로 돌아옴, 잠시간이지만 배가 정박함에 가깝다. 지상의 모든 식당과 부엌은, 소화기관을 갖춘 동물인 인간의 모항이다. 먹을 때, 모든 인간은, 돌아온다.

이처럼 허기짐과 배 채움의 반복은 여행(이동)과 거주(정주)라는 두 가지 원형적 존재 모드의 축소판 복사본이다. 이런 관점에서 다시 보면, 여행의 의미가 색다르게 조명된다. 여행을 한다는 건 무엇인가? 그건 화덕과 화로를 떠난다는 것, 손수 밥 지어 먹을 수 없는 환경에 노출된다는 것, 허기짐이라는 위협적 요소와 좀 더 과감히 만난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여행이란 장소가 아니라 자기를 만나는 일이라 했지만, 그 자기에는 추위와 배고픔에 취약한 자기, 다른 생물을 섭취해야만 생존 가능한 동물로서의 자기도 포함되어 있다.

물론, 허기짐이라는 문제를 사전에 단단히 준비하는 경우도 있다. 17세기 후반 일본의 곳곳을 도보로 여행했던 마츠오 바쇼. 그는 취사도구를 짊어지고 여행했을지도 모른다. 현대에는 숫제 집을 옮기는 형태의 여행, 즉 캠핑카를 활용하는 여행이 인기 있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유형의 여행은 오늘날 여행의 주류는 아니다. 다수는 취사도구 대신, 더 간편하고 효율적인 도구를 준비한다. 돈 말이다. 여행자는 자발적으로 외식(外食) 상황에 처하는 사람이다.

이것은 기회일까? 아니면 위기일까? 판매되는 음식물의 안전도에 초점을 맞춘다면 모종의 위험에 노출되는 일이지만, 안전도를 신뢰한다면 그리고 지역 특산물 경험에 방점을 둔다면, 새로운 식문화를 맛볼 기회를 손에 쥐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아예 식문화 여행을 기획하기도 한다.

<먹는 인간>이라는 책을 남긴 일본의 작가 헨미 요도 그런 사람이었다. 헨미 요는 이 책에서 먹어야 생존할 수 있는 인간 동물의 풍경, 대도시의 식문화 풍경을 구석구석 게걸스럽게 ‘맛본다.’ 그런데 ‘판다 밧’이라 불리는 남이 먹다 남긴 음식을 먹는 사람들을 이야기하며, 그는 불현듯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실은 18세기 프랑스 미식가로 유명한 브리야사바랭이 <미식 예찬>에서 한 말을 생각하고 있었다. “짐승은 먹이를 먹고, 인간은 음식을 먹는다. 교양 있는 사람만이 비로소 먹는 법을 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사람도…짐승과 똑같이 먹이를 먹는다. ‘교양 있는 사람’, 돈이 많은 사람은 우아한 모습으로 먹이를 먹을 뿐이다.”

 

그렇다. 우리는 foods, lebensmittel, aliments이라는 서양 단어를 ‘먹이’라고 번역해야 한다. 우리의 입에 들어가는 그 물질이 먹이의 성격을 지님을 우리 스스로에게 부러 알릴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여행을 한다는 건, 동굴을 떠난 동물이 되어 먹잇감을 찾는 상태로 진입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 현대인은 사냥 기술도, 야생지에서 요리하는 기술도 터득할 기회를 가지지 못했다……

여행으로 잃고 마는 것도 있겠지만(막대한 양의 온실가스를 배출하는 항공기를 생각해보라. 항공기 운항은 사실 국제법에 의해 제한될 필요가 있다.) 여행은 분명 여행자에게 무언가를 선사한다. 인생이 곧 여행이라는 비유는 적절하지만, 그렇다면 집을 떠나는 여행이란 한층 더 집약적인 인생살이일 것이다. 인생이 만일 공부의 과정이라면, 여행은 ‘인텐시브 스터디 코스(intensive study course)’일 것이다. 사실이 이러하기에, 짜릿한 체험이나 배운 바가 없는 여행에서 우리는 왕왕, 다 식은 자장면 맛 같은 허무감이나 자괴감을 맛보곤 한다. 행복한 여행은 바로 이 두 가지, 각별한 체험과 공부로만 가능하다.

따라서 여행은 소비의 또 다른 버전일 뿐인 관광과는 적극 대립된다. 장소와 물질의 소비에 급급한 이가 있다면, 설혹 집을 떠나 있더라도 그이는 여행자는 아니다. 여행자는 지도를 손에 든 사람, 서재와 부엌을 포기한 사람, 몸과 허기짐을 대면하려는 사람, 미지(未知) 자체에 매혹된 사람, 습관과 이별하려는 사람, 흥분과 평온, 둘 다를 추구하는 사람, 새로운 시간과 앎을 찾는 사람, 새로운 자기를 만나려는 사람이다. 여행자, 그는 몸으로 돌아간 자, 살아가는 법을 배웠던 최초의 순간으로 돌아간 자, 동시에 미지의 미래로 그 몸을 던지는 자다. 처음 걸음마를 배웠던 순간의 쾌감이, 모든 여정의 절정의 순간에 여행자의 몸에 다시 도래한다.

그러나 허기짐이라는 중력의 무게는 거주자와 여행자를 차별하지 않는 법. 스스로 집 밥을 떠났던 바로 그 사람은, 지친 몸을 질질 끌며 어디론가 기어 들어가게 된다. 그런데 바로 거기에서 대단한 미식(美食)을 경험한다면, 어떨까? 그것은 일종의 소비일까, ‘각별한 체험’일까?

앞서, 허기짐을 해소함이란 정박이라고 했지만, 허기짐이 미식으로 해소될 때, 그것은 정박이 아니라 또 다른 여행이 된다. 여행자는 미식의 순간에, 막간극과 같은 막간 여행을 한다. 미식을 체험하는 이는 설악산을 오르는 사람과도 같다. 신흥사에서 산의 위세를 발견하는 사람처럼, 여행자는 우선 맛을 발견한다. 곧 이어 비선대를 만나며 산에 감복하게 되는 등산객처럼, 미식을 음미하기 시작한 여행자 역시 맛에 탄복하게 된다. 마등령과 나한봉을 지나 공룡능선에 이르게 된 사람은 이제 산의 실체를 실감하여 황홀경에 빠져 드는데, 미식에 온 심신이 젖어드는 사람 역시 비슷한 실감과 황홀의 단계에 도달한다. 공룡능선을 타고 있는 사람이 그러하듯, 우리의 여행자는 이제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조차 느끼지 못하게 된다. ‘감상하는 인간’, ‘한가한 인간(Homo Otiosus)’이 그의 존재의 심연에서 튀어나와 그의 존재 전부를 잠식해버리는 시간이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 미식은 감각의 축제 이전에 기억의 축제이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맛본 경이로운 맛이 우리의 기억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그 순간 다시금 용틀임을 하기 때문이다. 모든 미식은 모항으로의 귀항이라는 작은 여행이다. 미식을 체험하는 여행자는 잠시간 거주자, 좌표 있는 자, 뿌리 있는 자로 되돌아가는 여행을 한다.

하지만, 음식 혼돈의 시대인 오늘날엔 오직 순미(醇味)한 맛만이 미식이다. 순미한 맛이란 “본디 지닌 그대로의 순수하고 진한 맛”이라는 뜻이다. 농약, 화학 비료, 기준치 이상의 세슘, 화학 첨가물, 농민의 곤고함, 잔혹한 도축 등 불순 요소와 인연이 없는 음식의 맛이 바로 순미한 맛이다. 19세기까지는 어디에나 널려 있었지만, 20세기 들어 거의 멸종하다시피 한 이 맛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이 맛이 있는 곳이라면 그곳으로, 지금 나도 떠나고 싶다. (<함께사는길> 2017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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