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탁과철학(11)-공생공락의 식탁

 

20세기 자본주의의 물질 풍요가 초래한 ‘인간의 빈곤’을 지적했던 20세기의 비평은, 4차 산업혁명론이 호들갑스럽게 회자되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값어치가 있다. 20세기에 구축된 대량생산 대량소비 체제, 1920년대 이후 출현한 소비주의 라이프 스타일 역시 이 순간에도 지속, 확산되고 있고, 인간과 노동의 부품화, 욕망을 산출하는 소비라는 질곡은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물질은 풍성해졌지만, 그럴수록 인간은 더 초라해졌다.

이반 일리치(Ivan Illich)는 <공생공락을 위한 도구(Tools for conviviality)>,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The right to useful unemployment)> 같은 책에서 이 문제를 깊이 파고 들었다. 그가 보기에 현대인은 능력이라는 면에서 매우 왜소해지고 말았는데, 원인은 개인이 상품 구매자로, 시장에 상품을 공급하는 직능인(피고용인-기계 부품 같은 임금 노동자)으로 환원되는 사태, 그 자체였다. 달리 말해, 이윤을 목적으로 대량 생산과 소비(수요 창출)에 집중하는 시장 체제, 그리고 전문가 집단에 의한 창의성 독점(일리치의 용어로는 ‘전문가 제국’)이 문제의 진원이었다. 그리하여 현대인은, 유아가 부모에게 거의 모든 것을 의존하듯, 삶에 필요한 거의 모든 것을 남에게 의존하게 되었다는 것이 일리치의 진단이었다. 일리치는 이것을 ‘현대의 가난’, ‘신종 가난’, ‘새로운 무력함’이라고 불렀다.

혹자는 이러한 사태가 자본주의 체제의 효율성으로 인한 것이며, 유아 상태에 있다고 해서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몇 가지 점을 숙고해봐야만 한다. 한 가지는 자유라는 사안이다. 부모는 모든 것을 유아에게 제공하며 유아의 세계를 지배하다시피 한다. 하지만 세계에 대해 자기만의 관점을 갖추게 되는 아동에게 이런 피지배 상태는 결코 자유 상태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대량 생산 체제의 기계·도구들은 개인을 각종 수고로부터 자유롭게 하지만, 자유롭게 창의 활동을 할 삶의 가능성의 물량 자체를 대폭 줄였다.

둘째, 행복의 깊이에 관한 것이다. 예컨대, 어느 카페에서 레몬티 한잔을 사 마시는 행복이 있다. 그리고 레몬 나무를 길러 레몬을 따고 레몬청을 만들고, 자기가 직접 빚은 찻잔에 그 청을 담고, 자기가 만든 의자를 레몬 나무 아래에 놓고, 그 의자에 앉아 레몬티를 마시는 행복이 있다. 이 둘 중 어느 쪽의 행복이 더 깊을까? 소비는 뇌에서 또 다른 불만족을 빠른 속도로 양산하지만(칼 마르크스의 말 그대로 “새롭게 생겨난 것은 굳기 전에 모두 낡게 된다.”), 창작 활동은 느린 속도로, 즉 오랜 시간에 걸쳐 우리를 만족시킨다.

마지막으로 생각해봐야 하는 것이 있다. 현 글로벌 생산 체제가 지구 생태계와 동식물들, 미래 세대 인류, 그리고 제 3세계의 힘없는 노동자들에게 가하는 해악의 무게가 그것이다.

일리치는 개인의 자율성의 확대, 창의성의 증진, 천연자원의 보호, 자원과 도구의 공평한 분배 등이 모두 성취되는 새로운 생산 양식을 고안하려 했는데, 이 생산 양식을 지칭하고자 ‘conviviality’라는 새로운 용어를 제시했다. ‘Convivial’은 ‘화기애애한 모임의 즐거움을 선호하는’이라는 뜻으로, 본디 연회와 관련된 용어다. 이 단어에는 두 가지 가치가 침윤되어 있는데, 하나가 ‘개인의 지극한 즐거움’이고, 또 하나가 ‘남과 더불어 누림’이다. 이 단어에 꼭 맞는 우리말은 찾기 어렵지만, 그나마 근접한 것이 ‘공생공락共生共樂’이다. 일리치가 고민한 것은 즐거움의 탈환 그리고 공정함의 기초 위에서 가능한 즐거움이다.

일리치에 따르면, 생산을 위한 도구는 세 가지 중요한 가치를 보호하는 것이어야만 한다. 생존, 정의, 그리고 각자가 자율적으로 정하는 작업(work)이라는 가치다. 이 세 가치를 지배적 가치로 세우고, 현재의 산업적 생산 도구를 재편하자는 제안이다.

생각해보면, 음식이라는 주제의 경우에도 일리치의 통찰은 그대로 적용된다. 동물 자체를 ‘종속영양생물’이라 부르지만, 현대인은 정말로 영양에 관한 한 크게 (이른바 생산자들과 요식업체들에게) 종속되어 살아가고 있기에, ‘가난’의 정도는 그야말로 심각하다. 게다가 세계 온실가스 배출량 중 음식 관련 배출량이 40% 이상으로 집계되고 있으니, 우리의 식탁은 많은 경우 죽음의 식탁이기도 하다.

하지만 어떻게 공생공락의 식탁을 차릴 수 있을까? 몇 가지 기준을 생각해보면 이러하다. 우선, 생산 작업의 자율성이다. 모두가 텃밭농사에 나서는 것이다. (상자 텃밭이라면 도시인도 가능하다.) 식 소비자의 표면적을 줄이고, 식 생산자의 표면적을 늘려가는 것으로, 전체 공동체 차원으로 생각하면, 이 문제는 지역 자급형 소량 생산 체제로의 전환을 시사한다. 그리고 늘어나는 것은 자연농지·유기농지여야 한다. 다음으로, 땅과 자연에 공정하고 당당한(Fair) 태도를 취하는 농민, 그리고 그런 농민의 유통망을 고집하는 것이다. 농지의 생물을 돌보는 방식의 농업은 곧 농지를 지속 가능하게 하는 농업이기에 미래 세대에도 공정하고 당당한 농업이다. 이런 농업으로 나온 농산물로 요리한다면 정의와 생존이라는 가치를 부엌에서 한꺼번에 실현하는 셈이 된다. 마지막으로, 손수 식단을 짜고 창의적으로 요리한다면 그리고 그것을 나누는 범위가 좁지 않다면, 공생공락의 식탁일 것이다.

공생공락의 식탁은, 먹을거리에 관한 한 지배당하지 않고 지배하기라는 목적의 달성(나는 이것을 “푸드 자치·푸드 스와라지Food Swaraj”라고 부른다.)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를 위해서는 앎이 기본이다. 즉, 입으로 들어가는 물질이 어떤 물질인지를, 그 물질이 몸에 끼치는 효과를, 그 물질의 생산과 유통 과정이 농지와 자연계와 농민에 끼치는 효과를 아는 것 말이다. 식당이나 카페의 카운터에서 “이것이 무엇이냐, 어디에서 왔냐?”고 물어보면, 백이면 백 눈을 다시 뜨고 관련 기관이나 업체에서 나왔느냐고 물어온다. 그러나 우리들 식 소비자들 모두가 이런 질문을 할 권리가, 요식·유통·생산업체에 식 정보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

푸드 자립, 푸드 자치를 성취하는 일은, 영양 자립, 건강 자립을 성취하는 길이기도 하다. 이윤 본위로 활동하는 이른바 생산업체(자)들과 식당들, 식 관련 질병으로 찾게 되는 병원과 약국, 건강보험 회사들에게, 유아처럼 의존해 있는 상태에서, 이제는 벗어나기로 하자.

먹는다는 것은 인연을 꿴다는 것, 인연에 꿰인다는 것이며, 어떤 인연을 꿰(만나)느냐가 곧 우리의 삶을 좌지우지하는 법이다. 그리고 식탁에 관한 한, 우리는 그 인연을 선택할 수 있기에 사실상 우리의 삶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 단, 조건이 있다. 안다는 조건이다. 그러니 칸트가 한 말 그대로, “감히 알려고 하라(sapere aude)!”(<함께사는길> 2017년 12월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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